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 [악마의 제금가]의 저주받은 주검
악마의 제금가란 소리를 들었던 니콜로 파가니니는 그의 별명에 얽힌 전설 못지 않게 기괴하고 파란곡절에 찬 생애를 보냈지만, 사후에도 그의 유채는 안식을 얻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구한 표박을 계속해야만 했다. 현재 이탈리아의 파르마 공동묘지에 잠자고 있는 파가니니 유체의 표박담에 얽힌 전설은 그 자체만으로 파가니니의 전기에 맞먹는 분량의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파가니니가 살고 간 삶의 궤적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의 생전의 이야기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하면 그의 유체의 표박담은 바로 그의 전생애를 비추어 주는 조명등 역할을 하는 것이다.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태어난 파가니니는 1840년 5월 27일, 프랑스의 니스에서 사망했는데, 그가 임종을 맞은 장소가 니스였다는 사실은 그의 사후 표박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요소가 되었다. 당시 제노아와 니스가 1815년 나폴레옹의 패배와 유배에서 결과된 <이탈리아 북서 지방의 영토적, 종교적 처리 규정>에 의해 대부분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파가니니가 니스에서 죽은 것은 바로 빈에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되었다. 게다가 이탈리아인 중에서도 유난히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의식이 강했던 제노아인들은 프랑스 지배가 부추겨 온 이탈리아의 자유주의를 말살시키려는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억악정책에 맹렬히 반발하고 있었으므로, 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그의 동포들은 파가니니의 죽음을 실제로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파가니니가 죽은 장소가 그의 고향인 제노아인들로 하여금 그를 무시하도록 만들었다면, 파가니니가 죽은 방식은 또 그의 모국 교회의 원로들에게 격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1815년의 규약은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교황의 옛날식 권위도 완전히 회복시켰기 때문에, 당시 이탈리아엔 중세적 교회의 모든 권위와 정책이 그 폐습과 더불어 무섭게 군림하고 있었다. 파가니니는 부활절 성사와 임종 때의 고백도 거절했을 뿐아니라(사실은 너무나 쇠약한 건강 때문이었지만) 막대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유언 속에 교회를 위한 자선이 전혀 포함돼 있지 않았던고로, 니스의 주교는 그가 성화된 땅속에 매장될 수 없다고 선고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파가니니의 유체는 무려 36년 동안을 이곳저곳으로 표류하게 되는데, 58년이란 생애를 오만 가지 병을 지닌 몸으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순회연주로 보낸 파가니니는 결국 죽어서도 안주하지 못할, 저주받은 운명이었던 셈이다. 우선 파가니니의 유제는 방부처리가 된 상태로 두 달 동안 그의 죽음의 침상에 놓여 있어야만 했다. 그런 다음 그 집의 지하실로 옮겨져 그곳에 1년 이상 남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파가니니의 아들 아킬레스와 친구인 그 세솔 백작을 중심으로 한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주교의 판결을 번복시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이들의 탄원에 의해 교회재판소가 개정됐으나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파가니니가 죽기 직전에 해고한 하녀를 비롯한 수많은 비방자들로부터 파가니니에 대한 나쁜 정보가 조사관들에게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실 파가니니의 생전에도 그에 대한 고약한 평판은 항상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난봉꾼, 수전노, 도박꾼 그리고 심지어 살인자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검은 마술단>에 가담하고 있다는 풍문마저 있었다. 기실 음악의 위대한 천재들 가운데 인격의 도덕적 측면에 관한 한, 파가니니만큼 불유쾌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니스에서 매장의 허가를 얻어 내지 못하자 파가니니의 친구들은 그의 고향 제노아로 그의 시체를 가져오고자 했으나 이것마저 거절당했다. 제노아에 있는 파가니니의 친구이며 변호사인 루이지 제르미는 국왕에게 탄원서를 보냈는데, 왕은 훨씬 동정적이었지만, 교회의 승인없이는 왕조차 아무 일도 해줄 수 없었다. 제노아 교회는 파가니니는 사악한 생애를 보냈으며, 자신이 기독교도라는 것을 망각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었으므로 허가할 수 없다고 했다. 오직 한 가지 남은 길, 즉 교황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파가니니의 아들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로마로 간 동안(1841년 9월) 니스의 보건 당국은 시체를 지하실에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드 세솔 백작은 빌프랑슈 근처의 바위투성이 해안에 있는 폐가인 '문둥이들의 집'으로 시체를 가져가서 어둡고 습한 구석방에다 부려 놓았는데, 얼마 안되어 괴상한 이야기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즉 황혼녘에 그곳을 지나던 어부들에게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또 고요한 저녁에 바다 건너에서 울려오는 바이올린의 가락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휴일에 바위산을 기어오르는 소풍객들은 시체가 있는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기미를 누구나 느꼈다. 백작의 돈으로도 이들의 입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한번 백작은 이 달갑지 않은 시체를 옮겨야만 했는데, 처음에 올리브 기름 공장의 시멘트 통 속에 넣어뒀다가 다음엔 한밤중에 캡 페라 곶 위에 있는 어떤 개인 집의 정원으로 옮겼다. 제1부
마침내 파나니니가 죽은 지 거의 4년이 되는 1844년 4월, 파가니니의 시체는 세 개의 관속에 넣어져(당시 프랑스의 리비에라엔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다.) 배에 실려 제노아로 이송되었다. 그런 다음 짐마차에 옮겨져 그 옛날 파가니니가 젊었을 때 농사일을 도왔던 시골 - 라메로네에 있는 가족 저택으로 실려 갔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1845년 4월에 아킬레스는 파가니니의 이전 후원자였던 마리 루이제 대공비로부터 부친의 유체를 빌라 가욘느(파가니니가 만년에 구입한 대별장)로 옮겨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별장의 정원 속에 마침내 부친의 유택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니스 주교의 간악한 판결은 1876년이 되어서야 무효화되었으며, 그때 비로소 파가니니의 유체는 파르마의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지만, 이후에도 파가니니의 유체는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즉 1893년에 체코의 바이올리니스트인 프란츠 온드리첵이 파가니니의 시체를 보기 위해 그의 손자 아틸라를 설득해서 무덤을 발굴했던 까닭이다. 그로부터 3년 뒤 파르마에 새로운 공동묘지가 개관됐을 때 다시 한번 관을 개봉했는데, 이때 현장에 있었던 한 목격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파가니니의 모습은 아직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체의 하부는 뼈의 더미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후의 무덤에 가족들이 세운 거대한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명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니콜로 파가니니의 유해가 잠들다. 온 유럽에 영감을 준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그는 자신의 거룩한 음악과 최고의 재능에 의해 전례없는 위대한 명성을 이탈리아에 가져다 주었노라.
역사상 유례가 없을 듯한 이같은 시체의 표박담은 파가니니 자신을 이해선 잔혹한 이야기 같지만, 어떤 의미로 그의 기묘한 이름을 비롯해서(Paganini는 '작은 이교도'란 뜻이다.) 그가 살고 간 행적이나 그의 기이한 예술적 천재, 그의 주위에 항상 떠돌던 뭔가 마술적이고 기괴한 분위기, 그리고 그외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그의 성격적 특질과 결부시켜 볼 때, 퍽이나 그에게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파가니니에겐 항상 그의 특이한 매부리코를 비롯한 얼굴 모습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연주와 그의 모든 거동에서 보는 사람에게 무언가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괴기가 풍겼다는 것을 많은 동시대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마치 E.T.A. 호프만의 환상소설에 등장하는 크라이슬러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는 한때 재미로 자신이 지하세계의 미지의 마술적 힘과 접촉하고 있다고 공언함으로써 사람들의 공포어린 상상력을 부추겼던 것도 사실이다. (후에 그는 이말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의 인상엔 고뇌와 천재와 지옥의 징조가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고 기술한 하이네의 말은 파가니니의 특징을 단적으로 요약한 듯이 보인다. 또한 괴테는 1829년 11월 9일자로 첼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가니니의 연자를 <화염과 구름의 기둥 같았다>고 표현했다. 파가니니가 유례없이 강한 육체적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사후 그를 둘러싸고 형성되기 시작한 이른바 <파가니니 전설>의 굳건한 한 부분이 되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이를테면 19세기의 유명한 <바이올린>이란 저서 속에 게오르크 두브르크는 파가니니의 생존을 '흥분과 탈진이 번갈아 되풀이되는 연속체'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의 기분이 변덕스럽고 불안정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때때로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이유없이 몇 시간이나 말없이 우울한 기분으로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또 아무런 명백한 동기도 없이 갑자기 사나운 즐거움으로 흥청거리기도 했다.' 이것은 H.R. 헤위스의 <파가니니의 전 삶은 수많은 심리학적인 열기와 냉기의 연속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 나의 음악적 생애, 1884년>란 기술과 부합된다. 한편 파가니니와 동시대인이었던 비평가 루드비히 렐스타프의 기술은 한층 더 흥미롭다. 생전에 파가니니는 자신의 이야기가 필경 인쇄되리라는 사실을 염두해 두고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자신이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어느땐가 프라하의 J.M. 쇼트기 교수(1830년에 파가니니의 전기를 맨 처음 출판했다)에게 자기가 어떤 미지의 음악적 비밀을 소유하고 있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렐스타프는 '나는 그 말을 들었으나 믿지는 않았다.' 고 단언했다.
파가니니라고 하는 이름이 그 자신인 것이 아니라, 그는 쾌락, 우롱, 망상 - 그리고 타오르는 듯한 고통의 화신이며, 바로 이것이었다가도 바로 저것이 되는 돌변의 명수이다. 그러나 파가니니는 실제에 있어서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는 곤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그에겐 곤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속삭이는 듯한 음률의 곡조를 다시 한번 되풀이했을 때, 장내엔 흡사 그 혼자만 있는 것 같았다. 청중은 바이올린 주자의 숨이 막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드디어 최후의 트릴러가 울리자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는 외투를 받아 입었으나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가장 최근의 파가니니 전기작가 존 섯전은 파가니니의 기복이 심한 인간성을 그가 태어난 도시 제노아에 비유하고 있다.
부침이 심한 해안도시 - 빈부의 격차, 아름다움과 추함의 극단적 대조, 질서와 혼돈의 공존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제노아는 이 도시가 낳은 가장 유명한 아들 니콜로 파가니니의 성격 및 생활양식과 많은 점에서 공통된다. - 제2부
거의 생애의 끝에 이르기까지 파가니니는 이같은 양극단의 심리적 줄달리기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거센 열광과 깊은 절망, 비상한 활수와 탐욕이 서로 밀치며 그의 속을 넘나들었고, 정신의 품위와 힘은 어리석은 자부심과 좀스러움에 자리를 내주기가 일쑤였다. 대음악가들의 질병을 주로 연구한 독일의 케르너 박사는 파가니니의 이같은 특성이 그가 네 살도 되기 전에 앓았던 홍역에서 유래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홍역중 파가니니는 '강직경련'의 증상이 나타나 이틀 동안 송장처럼 빳빳하게 누워 있었는데, 이때 그의 모친은 이미 시체를 쌀 수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같은 상태에서 '홍역 병원체에 의한 만기성 뇌염'이 유발됐다는 게 케르너의 주장이다.
이 사실로부터 거장이 지닌 여러 가지 특이성, 즉 그의 비사회적 태도, 자극 과잉, 언어 동작의 경직성, 성적 탈선, 비뚤어진 성격, 그리고 그외 그의 사생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이상성 같은 것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기술이란 말로써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 결국 정신적,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돌릴 수밖에 없는 전무후무의 저 완변한 예술적 명기도 필경은 이 병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아주 그럴 듯한 해석인 것 같다.
파가니니는 어떤 음악가보다도 많은 병을 앓았다. 33세 이전에 이미 그는 심한 조로현상을 나타냈으며, 40대로 접어들 무렵부터는 어쩌다 간혹 건강이 좋은 수도 있었으나, 거의 언제나 환자의 생활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확실히 알려진 병만 해도 폐결핵, 매독, 루머티즘, 후두염, 신경장애 등등, 마치 그의 몸은 세상의 온갖 흉악한 병균이 서식하는 소굴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1828년에는 매독의 제3기 증상으로 보이는 하악골 농양이 발생해서 프라하에서 2회의 연주회를 개최하는 동안에 아랫니를 몽땅 뽑아야 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만성 인후염(이 역시 매독으로 인한 병발증)으로 인해 만년의 2년 반 동안은 실제로 무성에 가까운 상태로 지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그는 임종의 '고해'를 거부한 것도 실은 말을 할 수 없었던 데 주된 원인이 있었던 듯하다.) 환갑은 못 넘긴, 58세란 생애에서 파가니니는 50년 이상을 줄곧 사건에 찬 다채로운 생을 살았지만, 만년의 수년간도 결코 순조롭거나 평범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을 위한 어느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인생에서도 그의 가련하고 쇠약해진 육체 속에 삶을 연주할 수 있는 숨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까지 비르투오스(Virtuoso)적 테크닉을 괴시했던 셈이다. 즉 본질보다는 화려한 효과에 집착했던 것이다. 가지가지 질병으로 쉴새없이 시달리면서도 그는 죽는 순간까지 삶에 집착했다. 참으로 그는 죽고 싶어하지 않았다. 개업의건 아니건 어떤 의사라도 약간의 희망을 암시만 해도 그는 거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수많은 의사들의 온갖 처방에 그는 절망적으로 의존했다. 카타르를 위한 핥아 먹는 기침약, 루머티즘을 위한 찜질약, 위장을 위한 설사약과 진정제 등등. 그러나 이 모든 약들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절망에서 소리쳤다. '위대한 신이시여, 내겐 더 이상 힘이 없나이다.'
1834년 9월 28일 파가니니는 유럽 정복의 야심을 품고 빈을 향해 고향을 떠난 지 6년 반 만에 제노아로 다시 돌아왔다. 바라던 대로 그는 필적할 수 없는 성공과 불후의 명성으로 유럽을 정복했으나 많은 상처와 불치의 병을 안고 귀향한 것이었다. 명성과 돈은 얻었으나 잃은 것은 건강이었다. 더욱이나 마지막 파리에서 떠나기 직전에 '자선공연'에 출연하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파리의 신문에서 호되게 얻어맞은데다, 또 미성년의 소녀를 유괴하려 했다는 추문에 휘말려 마치 '꼬리를 다리 속에 감추고 살금살금 달아나는' 짐승처럼 그는 소리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는 위안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왔고 조국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파르마, 피아센짜 그리고 제노아 등지에서 그는 여러 차례의 연주회를 가졌고 수많은 영예를 입었으며, 마지막엔 그가 해외에 있을 동안 변호사를 통해 사두었던 파르마 근처의 대저택 빌라 가욘느에 정착했다. 파가니니의 회생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얼마 안 가 그는 다시 파리에 나타나게 된다. - 제3부
당시 파르마의 통치자는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제 대공비였는데,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서 예술가들을 환대했던 공비는 빈에서 만난 적이 있는 파가니니가 자신의 시민이 된 것을 매우 흡족히 여겼다. 1835년에 공비는 파가니니를 궁정극장의 행정위원으로 임명했으며, 공비의 생일에 궁정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둔 뒤 그는 음악 전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836년 1월 5일엔 '나는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달성해서 기쁘다.' 고 했을 만큼 파가니니는 당시의 상황에 만족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시대를 앞질러 완벽한 궁정 오케스트라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했던 관계로, 결국 궁정의 음모에 휘말려 얼마 안되어 사임하고 만다. 만약에 그의 계획이 성공했던들 아마도 그의 이름은 19세기의 오케스트라 발전사에서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파르마 체험은 파가니니의 사기와 쇠약한 육신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12월에 니스에서 가진 3회의 연주회 뒤 친구 제르미에게 쓴 편지에도 당시의 그의 심경이 반영되고 있다.
내 바이올린도 나처럼 약간 기분이 언짢다네. 하지만 마르세이유에서 연주회에선 완벽하게 연주할 것이네. 내겐 힘보다 용기가 더 많으니까.(과연 그의 예언대로 마르세이유의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비르투오소 시대가 끝났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모험을 꿈꾸었다. 그에겐 마치 악마와도 같은 불굴의 끈기가 있었다. 1837년엔 친구 레비쯔의 설득에 넘어가 파리에 '카지노 파가니니' 란 살롱을 개설했는데, 이 기업의 실패로(두 달만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잃었으며 친구에게 배신당한 울분은 그의 악화된 건강을 결정적으로 파손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그는 파리를 떠나기 직전(1838년 12월 16일) 베를리오즈의 연주회에 참석해서 2만 프랑이란 거액을 베를리오즈에게 희사하는 아량을 보였다. 또한 그는 옛날부터 품어 왔던 계획, 즉 자신이 현악기상을 해보려는 꿈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또 '연습기간을 줄일 수 있는 바이올린 교습' 에 관한 책을 저술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으며(실현하지는 못했다.), 베토벤의 만년의 현악사중주들을 연주할 계획에 대해서 제르미와 쉬포어에게 써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839년 9월에 아들 아킬레스와 함께 고향에 돌아온 파가니니는 거의 송장에 가까웠다. 너무 쇠약해서 마차를 타고 내릴 때도 다른 사람의 부축이 필요했다. 고향의 친구들은 제발 자기들과 함께 있어 달라고 애걸했지만, 제노아의 습한 공기가 자신의 건강에 해롭다고 확신한 파가니니는 몇 주일 뒤 다시 니스를 향해(배편으로) 출발했다. 이것은 그의 최후의 여행이었다. (아들은 언제나 그의 여행에 동반했다.) 파가니니의 마지막 역경과의 사투는 한때 부와 명성에 있어 정점에까지 올라갔던 이 천재의 파토스와 비극의 축도라 할 만하다. 작곡에서나 연주에서나, 바이올린으로부터 가능한 온갖 비밀을 이끌어 내어 사람들로부터 '신의 하모니를 연주한다.' 는 소리까지 들었던 이 유례없는 천재는, 이제 파선한 배처럼 망가진 몸을 하고 외국 땅 한가운데 몸서리나게 외로운 존재로 누워 있는 것이다. 손은 떨리고 그는 펜을 거의 쥘 수조차 없었다. 끊임없는 기침과 현기증과 경련은 그를 전혀 잠잘 수도 없게 했다. 두 다리는 부어 올라 걸을 수도 없었으며, 목이 부어 말을 할 수도 , 음식을 삼킬 수도 없었다. "나의 몸은 문자 그대로 조각조각 분해돼 가고 있다. 이제 나에겐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다." 물론 그는 이따금 친구들의 방문과 편지를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옆에는 오직 아들밖에 없었다. 니스에는 그가 찾던 태양은(실제로도, 비유적으로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비참한 상황을 가리켜 방탕아이며 죄인으로서 그가 받는 천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지방 교구의 신부에게 임종의 고해를 하기를 거절했을 때.... 죽기 얼마 전 친구 제르미가 파가니니에게 과거를 잊고 현재를 생각하라는 얘기를 편지에 써 보냈을 때, '나는 인간이 미래를 볼 줄 모른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고 대답한 것을 보면, 그는 여전히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신은 끝까지 정복되지 않았지만, 육신은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 출혈에 이어 출혈이 계속되었으며 생명은 서서히 그의 육신을 빠져나갔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인간적인 애정을 쏟았던 오직 하나의 대상인 아들 아킬레스의 손을 꼭 잡고 있을 때, 생명은 마침내 이 불굴의 정신을 영원히 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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