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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한국 좌파독립운동 역사

by 3856 2008. 12. 22.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한국 좌파독립운동 역사


1918년 이동휘(李東輝)가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직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이동휘는 1917년에 러시아 10월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러시아 혁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곧 조선독립 달성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코민른 테극동 방면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던 그레고리노프의 도움을 받아 하바로프스크에서 1918년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주요간부는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박애(朴愛 : 박 마다베이), 선전부장 전일(全一), 비서부장 박진순(朴鎭淳 : 미하일 박), 정치부장 이한업(李漢業), 교통부장 김립(金立)이었다.

 

그러나 창당 직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적군파가 물러 나고 백군파가 시베리아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한인사회당도 활동이 어려워졌다. 국내에서 1919년에 3·1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이동휘 등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규합하여 적당한 기회에 레닌 정부로부터 원조를 받아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대표자대회를 개최해 박진순·박애·이한영 등 3명을 사절단으로 뽑아 코민테른에 파견하기로 했다.

 

 1920년 모스크바로 건너간 이들은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에 가입한다고 선언하며, 당원명부를 코민테른에 제출하여 40만 원의 독립자금 원조금을 받았다. 한편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세력은 상하이[上海]로 와서 상해 임시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의를 통합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해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김립이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중엽 이동휘는 소련과의 관계강화를 통해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당시 임시정부 자체에 대한 격렬한 비판 여론을 기반으로 하여 임시정부의 전면개편을 주장했다.

 

이것이 거부되자 1921년초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세력은 상해 임시정부를 탈퇴하여 대한국민의회 부회장 김만겸(金萬謙)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을 조직했다.

 

1921년에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공산주의 운동에 의거해 조직된 단체이다. 한국인의 공산주의 운동은 레닌혁명 이후 시베리아에서 기원적으로 발생하였다. 즉, 1918년 6월 26일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고, 1919년 1월 22일 이르쿠츠크에서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한인지부가 조직되었다.

 

전자는 이동휘(李東輝), 후자는 김철훈(金哲勳)가 대표하였다. 양자는 근본적으로는 모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두 조직의 체질상 차이는 전자가 서부 시베리아의 귀화인 집단이라면, 후자는 동부 시베리아의 귀화인 집단이라는 데에 있었다. 전자의 구실은 시베리아의 한인을 반일운동에 규합하는 일이었고, 후자는 서부 시베리아의 한인을 볼셰비키전선에 동원하는 일이었다.

1919년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동휘는 그 해 8월 말 상해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이동휘는 레닌정권의 힘을 빌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첫 포석으로서 1920년 봄 상해에서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이동휘의 심복인 박진순(朴鎭淳)·김립(金立)·이한영(李漢榮) 등의 한인사회당 간부를 중심으로, 여운형(呂運亨)·조완구(趙琬九)·신채호(申采浩)·안병찬(安秉瓚)·이춘숙(李春塾)·조동호(趙東祜)·최창식(崔昌植)·양헌(梁憲)·선우 혁(鮮于赫)·윤기섭(尹琦燮)·김두봉(金枓奉) 등의 임시정부관계자들도 가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20년 12월 모스크바 자금을 상해로 운반해 온 김립이 이 돈을 임시정부에 주지 않고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동휘의 위신이 크게 떨어져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공산주의 그룹 이탈은 급속히 표면화되었다.

  이동휘는 1921년 1월 10일 자파만의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모스크바 자금을 공산주의 운동에 사용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또 공산주의 그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고, 그 달 23일 당의 임시 간장(簡章) 12개조, 당규율 5개조, 당정략 5개항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대표자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에는 국내와 만주 및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당선언 및 강령규약을 채택하고, 중앙위원회책임위원에 이동휘, 중앙위원 김립·이한영·김만겸(金萬謙)·안병찬, 번역부위원 여운형, 출판부위원 조동호 등의 지도부를 선출하였다. 이 당을 세칭 상해파고려공산당이라고 한다.

  한편, 1919년 9월 5일 이르쿠츠크에서 전로(全露) 한인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지도부는 고문 보리스 스미야스키, 위원장 김철훈, 비서장 이재복(李載馥, 일명 李檉), 정치부장 한(韓)안드레이, 선전부장 최고려(崔高麗), 군정부장 오하묵(吳夏默), 교통부장 박(朴)이노겐치, 중앙위원 26명이다.

  이 당은 시베리아의 이민족을 다루는 코민테른동양비서부의 수족이 되었다. 한인 청년들에 대한 공산주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당원과 일반 주민에 대해서는 ≪경세종 警世鐘≫이라는 기관지를 통해 정치사상교육 및 볼셰비키정책 침투에 힘썼다.

  이 당은 1920년 7월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 안의 고려공산단체 제1차 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전로고려공산당으로 당명을 개칭하였다. 이후 1921년 5월 4∼17일에 한인공산주의자대회를 개최하고 이동휘의 상해파고려공산당과 대립하는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이를 세칭 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이라고 한다.

  이 당은 상해파고려공산당을 이탈한 세력과 이르쿠츠크파 세력이 합작한 공산당이므로 종래의 전로고려공산당 간부는 모두 퇴진하고 안병찬·한명서(韓明瑞)·남만춘(南滿春)·한규선(韓圭善)·이재복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3일 당지도부에는 위원장 김철훈, 비서장 한안드레이, 정치부장 이성, 선전부장 최고려, 군정위원장 오하묵, 교통부장 박이노겐치로 등 구간부들이 그대로 복귀하였다.

 

그 뒤 상해파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은 서로의 유일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레닌 집단에 경쟁적으로 접근하려는 투쟁 관계에 들어갔다. 상해파에서는 중국 및 일본 공산주의자들과의 제휴, 국내공작, 민족무장단 지원 등을 통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반면 이르쿠츠크파에서는 상해지부 설치, 상해고려공청 조직, 러시아 안의 한인군사조직 장악 및 러시아 안의 한인볼셰비키화 공작 등을 통해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양파는 러시아 안의 한인군사조직을 둘러싸고 쟁탈전에 들어갔다. 1921년 6월 28일 수라셉흐카에서 상해파의 지원 하에 있는 사할린 의용대가 러시아적군에 가담한 이르쿠츠크파에 대항하다가 러시아적군 제29연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144명의 전사자 및 행방불명자를 내고 생존자 864명이 전원 붙잡히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를 세칭 자유시사변이라고 한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가 군국주의적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어 회유책을 쓰자, 우리의 민족운동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시기의 민족주의적 사조는 점진주의와 급진주의의 두 경향으로 나누어졌는데, 전자는 민족적 자산층사상의 주류였고, 후자는 해내·외의 극우·극좌적 민족운동자들의 사상적 주류였다.

 

1919·1921년은 점진 및 급진적 민족운동이 전개되고 민족주의운동 안에서의 사회주의적 경향이 나타난 시기였고, 1922·1923년은 민족주의운동 안에서의 사회주의운동의 분리와 사회주의운동 안에서의 소분파가 발생한 시기였으며, 1924·1925년은 민족주의·사회주의 양진영간의 대립의 노골화와 사회주의자 등이 조직정비를 시도한 시기였다.

 

우리 나라에 사회주의사상·마르크스주의를 처음으로 전파한 것은 일본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1922년 2월 동우회(同友會)의 이름으로 ‘전국 노동자제군에 격(檄)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하고 동우회가 계급투쟁의 직접적 행동단체임을 밝혔다. 동우회의 선언을 전후하여 국내에는 사회주의적 색채의 단체가 태동하게 되었는데, 그 중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북풍회(北風會)·화요회·조선노동당·서울청년회 좌파 등이 주요 좌익사상단체로 꼽힌다.

 

신사상운동을 전개한다는 목표에서는 원칙적으로 동일선상에 있는 그들이었지만, 경쟁적으로 자파세력의 확충에 힘쓰게 됨으로써 무원칙한 분파투쟁을 초래하는 폐단도 나타났다. 이미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각종 기성단체에 침투하여, 내용상 같은 단체들을 장악하는 분할공작과 사상·노농(勞農)·청년·부녀·형평(衡平) 등의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는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창당경위〕 

 

이처럼 신사상운동의 명분에 의한 사회주의운동이 점차 확대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1923년 6월 서울에 코민테른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을 ‘코르뷰로국내부(高麗局國內部)’라고 하였다. 이 기관의 책임비서는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코르뷰로에서 한국내 공산당결성의 밀명을 받고 서울에 잠입한 김재봉(金在鳳)으로, 그는 서울에서 화요회를 모체로 이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먼저 병립상태의 좌익합법단체를 정비하여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각각 결성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4월 18일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화요회가 주동이 되어 이 당을 조직하였다고 하여 일명 ‘화요파의 당’이라고도 한다.

 

이 당의 책임비서에는 김재봉이, 고려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전에 해외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상해공산청년회 비서였던 박헌영(朴憲永)이 각각 선출되었다. 코민테른은 이 당을 1국1당원칙의 코민테른 한국지부로 승인하였다. 이때부터 한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은 코민테른의 직접 지도하에 들어갔다.

 

〔제1차∼제3차 조선공산당사건〕

 

김재봉과 박헌영은 공산당조직확대와 고려공산청년회원 모스크바파견훈련을 적극 진행하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그 계획이 탄로되어 일제경찰에 일망타진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이다. 1925년 12월 서울에서 제2차로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조직되었다. 당책임비서에는 강달영(姜達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權五卨)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화요회의 요인이며 제1차 조선공산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은 사실상 제1차 당 및 공산청년회의 후속조직이었다. ‘강달영당’의 정치목표는 좌우연합의 국민적 당을 조직하여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강달영당이 민족진영의 천도교 중진들과 접촉한 것은 곧 민족적 기반의 좌우연합당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926년 6·10 만세운동을 통하여 3·1 운동을 재현하려던 강달영당의 계획이 거사 직전에 탄로되어 일망타진됨에 따라 좌우연합당은 실현되지 못하고 강달영당은 궤멸되었다.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한다.

 

이 무렵 일본에 있던 좌경유학생단체인 일월회(一月會) 간부 안광천(安光泉)·하필원(河弼源) 등이 국내에 진출하여, 1926년 11월 선언을 발표하고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은 민족주의운동을 경시하여서는 안 되며 종래의 경제투쟁형태를 정치투쟁형태로 바꾸어야 한다는 방향전환론을 내놓았다. 이 선언을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이라고 한다. 이 선언은 민족·공산 양진영의 협동을 추진하는 사상적 자극이 되었다.

 

이것을 세칭 ‘ML당’이라고 한다. 이 당을 조선공산당사상 이른바 ‘파쟁청산의 통일적 당’이라고 한다. 코민테른은 ML당에 대하여 당조직 운영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내렸는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만하다.

 

ML당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당책임비서를 김철수·안광천·김준연(金俊淵)·김세연(金世淵) 등으로 자주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년 2월 검거되고 말았다. 이 당의 고려공산청년회도 당과 같은 이유로 책임비서로는 양명(梁明)·하필원·김철(金哲)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당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것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한다.

 

1927년 12월 정통파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李英) 등이 서울 춘경원(春景園)에서 ML당의 정통성을 탈취하기 위하여 ML당과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지만,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1928년 4월과 6월에 일제경찰에 일망퇴진되고 말았다. 조선공산당사상 비정통파조선공산당 또는 춘경원당(春景園黨)이라고도 한다.

 

〔제4차 조선공산당 출범〕

 

1928년 3월 ML당의 잔당, 서울계의 신파 및 상해파 등이 연합하여 코민테른 지부로서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이것이 제4차 조선공산당이다. 이 당의 책임비서로는 조선공산당사상 처음으로 노동자출신의 차금봉(車今奉)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는 고광수(高光洙)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추적은 혹심하여 그 해 7월 차금봉당이 검거되었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국내에서는 사실상 명맥이 끊기고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 해체를 지령하여 만주와 일본 등지의 해외조직만 남게 되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촉구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 결정서를 통상 ‘12월테제’라고 한다. 이 테제는 궤멸된 조선공산당의 처지를 논술하고, 앞으로는 당체질을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으로 개선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조직은 국내에서는 자동적으로, 만주에서는 1930년 3월에서 9월 사이에, 일본에서는 1931년 10월에 각각 해체선언을 하고 각 파가 경쟁적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돌입하게 되었다. 1930년 9월 프로핀테른(Profintern:적색노조 인터내셔널)은 ‘한국의 혁명적 노동조합의 임무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고 일본제국주의 압박하의 한국노동운동의 지침을 하달하였다.

이 결의를 통상 ‘9월테제’라고 한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전쟁이 개시되자,

 

그 해 10월 프로핀테른 범태평양노조비서부에서는 한국에서의 범태평양노조비서부 지도자에 대한 ‘비격(飛檄)’을 통하여 한국노동운동에 대한 긴급지침을 하달하였다. 코민테른은 이상의 조처를 통하여 종래의 합법적 한국노동조합과 농민조합운동을 적색노동조합과 적색농민조합운동으로 급좌전시키고, 이것을 기반으로 혁명적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성공하지 못하고 대부분 검거되고 말았다. 박헌영의 서울콤그룹이 유독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지하에 남아 있었다고는 하지만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1940년 12월과 1941년 6∼12월 사이의 검거로 인하여 사실상 일망타진되고, 지도자 박헌영은 간신히 8·15광복까지 지하에 숨어 있었다.

 

한편, 1930년대 후기에 만주 동변도(東邊道) 일대를 활동무대로 한 김일성(金日成)일파의 항일유격대가 있었지만, 이것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수하였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의 계보에 속하지 않으며, 더구나 그때에는 조선공산당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해체과정〕 

 

그러나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초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던 박헌영이 중심이 되어 8월 20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이 조직은 여운형(呂運亨)·박헌영·허헌(許憲)·김원봉을 의장단으로, 한빈(韓斌) 등 9인을 부의장단으로, 이주하(李舟河) 등 33인을 중앙상무위원으로 하였다.

 

조선공산당의 당면주장은 조선의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인텔리겐치아 등 일반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위한 투쟁, 조선민족의 완전한 해방과 봉건잔재의 일소, 혁명적·민주주의적 인민정부수립 등이었다. 그러나 재건된 조선공산당은 소련의 후견을 업고 등장한 김일성에 의하여 1국1당원칙이 파괴되어 북한지역내에 독자적인 북조선노동당을 창립하였다.

 

그 뒤 박헌영은 미군정청의 공산당간부체포령과 함께 지하로 잠복, 월북하고, 조선공산당은 남한지역의 남조선노동당과 북한지역의 북조선노동당으로 양립하였으나, 결국 남조선노동당은 모두 숙청, 체포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白凡逸志
≪참고문헌≫ 若山과 義烈團(朴泰遠, 白楊堂, 1947)
≪참고문헌≫ 夢陽呂運亨(呂運弘, 청하각, 1967)
≪참고문헌≫ 韓國共産主義運動의 起源(스칼라피노·李庭植, 韓國硏究圖書館, 1961)
≪참고문헌≫ 自由市慘變에 對하여(申載洪, 白山學報 14, 1973)
≪참고문헌≫ ユミンテルン大會史(ロゾフスキ, 高等警察報 2 附錄)
≪참고문헌≫ 朝鮮獨立思想運動の變遷(朝鮮總督府法務局, 1931)
≪참고문헌≫ 高麗共産黨及全露共産黨梗槪(朝鮮總督府警務局)
≪참고문헌≫ 上海高麗共産黨宣言(朝鮮總督府警務局)

참고문헌≫ 韓國共産主義運動史 1∼5(金俊燁·金昌順,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1967∼1976)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집 1(한창수 편, 지양사, 1984)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서대숙, 현대사연구회 역, 화다출판사, 1985)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2(스칼라피노·이정식, 한홍구 역, 돌베개,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