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공산당 사건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
동만구역국 설립
1925년4월27일 조선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창립대회가 비밀리에 거행되였다. 이튿날인 4월18일, 서울에서 고려공산청년회도 창건되였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해외에 있는 조선민족인민들의 혁명투쟁을 구체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해외부, 만주부, 일본부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해 상해에 있던 조선공산당 국제련락부의 조봉암 등을 동북에 파견하여 만주총국의 설립사업을 하게 하였다.
1926년5월16일 조선공산당 화요파대표 조봉암, 최원택, 상해파대표 윤자영, 김하구, 이르크쯔파대표 김철훈 등은 흑룡강성 주하현(상지현) 일면파의 하동에 있는 김철훈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총국기관을 흑룡강성 녕안현 녕교탑에 두고 그 산하에 동만, 북만, 남만 구역국을 내오기로 결정지었다. 고려공청회에서도 만주총국을 세웠다.
만주총국에서는 동만구역을 설립하기 위하여 한응갑과 전룡락을 연변에 파견하였다. 두 사람은 1926년10월28일 밤 룡정시교 삼리촌에서 리주화, 김소연, 림계학, 채세진, 박두환, 리순, 김인국, 림민호 등과 만나 협의한 끝에 룡정촌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을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구역국산하에 비서, 선전, 조직, 검열 등 부를 설치하고 집행위원들을 선거하였다. 집행위원으로는 전룡락, 김인국, 리순, 리주화, 림민호, 채세진, 김소연, 림계학과 후에 총국에서 한사람을 파견하기로 하여 도합 9명이였다. 전룡락이 책임비서를 맡고 김인국이 조직부장, 리순이 선전부장, 표면부원에 김소연, 검열부원에 채세진, 고려공산청년회책임자에 림민호가 선거되였다. 동만구역국이 조직된후 그들은 연변의 여러 계렬의 조직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룡정, 평강, 화룡, 국자가, 동불사, 명월구, 왕청, 라자구, 훈춘 등 지역에 17개의 세포조직을 내왔다. 1927년의 통계에 의하면 동만에는 19개 기층당조직과 116개 외각단체가 있었는데 혁명단체의 성원은 9766명에 달했다.
“만주총국은 설립된 그날부터 조선공산당의 방침, 로선에 근거하여 사업을 벌려나갔는데 사실은 연변의 실정과 조선의 실정은 같지 않았습니다. <조선연장론>은 연변실정에 부합되지 않는데도 조선공산당정강을 연변에 결부시키려 했습니다.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낳았지요. 그러나 맑스주의 전파, 일제에 대한 타격, 혁명군중조직의 단합, 당기층조직의 확대, 허다한 우수한 당간부양성 등 면에서 걸출한 역할을 한것만은 사실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만주총국과 동만구역국의 설립은 금후 연변에서의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고 피력, 방면 여러 공산주의단체들간의 파쟁이 심했기에 단결에 막대한 영향을 기쳤다고 했다.
연변에서의 공산당 4개파
“연변에는 <화요파>, <서울파>, <엠엘파>, <상해파>등 4개파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초에 쏘련이 이르꾸쯔크파와 리동휘가 조직한 고려공산당 <상해파>간의 모순을 조절하기 위하여 쏘련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두 파는 극동조직국을 세워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순이 계속 존재하고 악화되여 극동조직이 실패하자 극동조직국에서는 비밀리에 정재달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 진주에서 강영달과 련합하여 1923년7월에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북풍회>파와 련합하여 1924년11월 <화요회>를 건립하였습니다. <화요파>란 공산주의자들이 화요일날 한번씩 회의를 하기에 그렇게 부른것이였고 또 맑스의 탄생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 조직을 <화요파>라 불렀습니다.
두 번째 단체로는 <서울파>입니다. 당시 조선경내의 청년운동은 매우 활약적이였는데 그 지휘권은 장덕수, 리광수 등 자선계급우파들이 장악했습니다. <서울파>단체내부에는 <좌>파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인물이 김사국이였습니다. 후에 투쟁을 거쳐 <좌>파세력들이 우파세력을 물리치고 령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 세력들이 1925년4월 <고려공산주의동맹>과 <고려공산주의청년동맹>을 건립했습니다. 력사에서 이들을 <서울파>라 합니다.
세 번째단체로는 <엠엘파>입니다. 1920년 대초에 <엠엘파>는 <상해파>와 많은 모순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청단성원들이 박윤서, 김월선, 한빈 등 청년들이 <우리는 파벌투쟁을 반대한다>고 하면서 원 <엠얼파>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엠엘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1924년 룡정에 들어와 고려공산주의청년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또 남만의 반석현을 중심으로 기반을 닦아나갔는데 이들은 력사에서 <엠엘파>라 합니다.
네 번째단체로는 <상해파>입니다. 1919년8월에 리동휘가 쏘련에서 상해로 들어가 1921년5월에 고려공산당을 건립하고 중앙위원 위원장직을 담임하였습니다. 상해에서 건립되였다 하여 <상해파>라 하였습니다. <상해파>는 1921년 말에 중앙위원 김하구를 돈화에 파견하여 서상파의 중영총감부를 돈화에 세우고 국민회 회원들을 장악하여 <상해파>에 가담시켰는데 이를 력사에서 <상해파> 또는 <서상파>라 부릅니다.“
동만구역국에서는 광범한 대중들에게 맑스-레닌주의리론과 사회혁명사상을 선전하고 조선족가운데서의 선진분자들을 묶어세워 혁명투쟁을 이끌어나갔다. 그들은 청년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동만조선족로동총동맹, 녀성단체인 근북회(槿北會) 등 단체들도 내왔다. 1927년12월에는 각 민중단체들의 민족통일전선의 조직인 “전간도조선인단체협의회(全間島朝鮮人團体協議會)”를 결성하고 혁명투쟁을 활발히 밀고나갔다.
“제1차간도공산당사건”
1925년11월22일, 조선 신의주에서 조선공산당검거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하여 당시 전 조선국내적으로 공산주위비밀결사에 대한 대검거선풍이 일어났다. 그번 검거에 조선공산당책임비서 김재봉(金在鳳),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朴憲永)을 비롯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 및 성원들이 대량적으로 체포되였다.
그후 1926년6월에 있은 조선 “6.10”만세사건으로 당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였던 강영당을 비롯한 100여명의 당간부와 관계자들이 대거 체포되였다. 두차례에 결쳐 체포된 조선공산당 당간부들에 대하여 1927년10월에 일제는 공판대회를 열고 심판하였다.
만주총국은 일본공산당 후꾸모도주의의 “방행전환론”의 영향밑에 사상전파운동에서 정치투쟁에로 전환할데 관한 조선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군중을 발동하여 련속적인 반일시위를 단행했다. 1927년5월1일, 연변지구의 조선족혁명군중들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의 구체적인 지도밑에 룡정, 투도구 일대에서 “5.1절”국제로동절기념시위행진을 성대하게 진행하고 일제의 침략과 조선족인민들에 대한 파쑈적만행을 규탄하였다. 이번 시위운동은 별다른 저애없이 순조롭게 거행되여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동만구역국에서는 10월2일, 조선공산당사건에서 체포된 동지들의 공판대회를 반대함과 아울러 “일본제국주위를 타도”하고 “일체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는 보다 큰 반일시위를 단행키로 결정지었다.
10월2일, 룡정에는 큰 비가 억수로 내렸다. 하여 시위운동을 부득불 이튿날로 미루게 되었다. 이날 만주총국 책임대리비서인 안기성 등은 동만구역국 간부들과 함께 안기성의 집에 모여 이튿날의 투쟁계획을 연구하게 되었다.
사전에 이런 상황을 탐지한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는 경찰을 파견하여 안기성네 집을 포위하고 최원택, 안기성, 현칠종, 리주화, 김소연, 림계학, 박재하, 김규국 등 구역국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10월3일,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의 청년학생들은 손에 붉은기를 들고 거리에 떨쳐나와 삐라를 뿌리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시위대오는 거리를 지나 일본총령사관문앞에 가서 체포된 간부들을 석방하라고 하면서 강렬한 항의를 하였다. 청년학생들은 “일제침략을 반대하자!”, “일제백색테로 반대!”, “일체 정치범 석방!”, “무고한 교원들을 석방하라!”는 등등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를 단행하였다.
이번 사건에서 29명의 주요한 간부가 체포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100여명의 간부와 민중을 체포, 구금하였다. 그중 29명의 주요한 간부를 서울에 압송하여 징역에 언도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제2차 간도공산당 사건
당내파벌투쟁
조선공산당의 령도권을 장악하고있던 화요파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설립되던 그날부터 만주총국을 화요파중심으로 조직하려고 했으나 세력이 막강한 상해파와 청년운동에서 우세를 차지하고있는 엠엘파가 있어서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화요파의 조봉암, 최원택, 김찬 등은 상해파의 윤장영, 김하구, 엠엘파의 김응섭, 이르쿠쯔파의 김철훈 등을 흡수하여 표면상에서 각파로 조성되여 보이는 통일총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실제상 화요파가 의연히 책임비서, 조직부장, 선전부장(상해파의 윤자영이 병을 구실로 선전부장자리를 내놓아 후임으로 화요파의 김동명이 부임), 위원 등을 차지하게 되어 령도권이 화요파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었다. 후에 엠엘파의 박윤서를 군사부장으로 보충선거하였으나 결과는 화요파와 엠엘파간의 모습을 격화시켰을뿐이였다.
1926년5월 만주총국에서는 김동명(화요파)에게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조직할 임무를 주었다. 그러나 당시 엠엘파에서는 이미 고려공청회 만주비서부를 조직하고 실권을 장악하고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있으면서도 김동명은 고려공청회 만주비서부와 아무런 상론도 없이 김해일, 강우, 홍원석, 한진, 전승우, 최동욱, 리주화, 김훈, 김동명 등 9명으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구성하였다. 이에 엠엘파의 박윤서는 자신이 만주총국에 들어가지 못한데 대해 크게 불만을 품고 김동명에게 “개별행동을 취하여 별개의 공청을 조직했다”고 항의해 나섰다. 상해파에서도 화요파의 이런 처사에 대해 의견이 있었다. 하여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은 한때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27년8월 김동명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선전부장으로 부임된후 고려공산청년회만주총국의 책임비서를 엠엘파의 리종희가 맡아보게 되었다. 리종희는 김동명이 제의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위원명단을 무시하고 리윤수, 박사, 강진, 한익국, 김광근, 한사빈, 박병희 등을 위원으로 제기했다. 이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최원택은 리종희에게 원래의 결정을 집행할 것을 명령했으나 리종희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내에 파벌투쟁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최원택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이리하여 화요파, 엠엘파, 서상파(서울, 상해파)사이의 내부모순은 격화되였다.
1927년10월2일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이 터졌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주도하던 최원택을 비롯한 주요한 간부들이 일거에 검거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아 마비상태에 빠지고말았습니다. 거기에다 창립당시부터 잠재해있던 여러 파들 사이의 모순이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여 각파에서는 <자파중심>으로 혁명세력을 편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 당내 여러 파들이 령도권문제를 둘러싸고 대립되였던 첨예했던 모순을 피력했다.
1927년10월9일 만주총국의 간부들인 감하구, 주건, 리신, 정창순, 김완, 정을산 등은 녕안현 장하(章河)의 서병택네 집에 모여 금후의 사업방안을 토의했다. 회의에선 우선 리순, 정창순, 김한호 등 3명을 연변에 파견하여 검거된 당원들을 위문하고 기층조직을 재건하면서 일제와 지방정부의 동태를 파악할 것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조직부장에 전룡락, 선전부장에 김봉만을 림시로 보충선거했다. 동만구역국의 사업은 남아있는 당원들은 잠시 책임지기로 했다. 만주총국과 동만도(1928년1월 구역국을 도로 고쳤음) 가부사이의 련계는 림민호, 전룡락, 김기철(김만선)등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3개의 만주총국
림민호, 김기철 등은 연길현 옹성라자에 와서 리순(엠엘파)등과 토의한후 금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동만도간부는 고려공산청년회(엠엘파) 가운데서 유력자를 선발하여 등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엠엘파의 본위주의의 경향이였다. 그와 반대로 상해파의 리환수, 주건, 김희창 등은 상해파의 가운데서 만주총국과 동만도의 간부를 내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만주총국과 교섭했다. “10.2”사건 즉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에서 별로 손실을 입지 않은 엠엘파와 서상파는 령도권을 놓고 점차 치렬한 공방전을 벌리였는데 모순은 본격적으로 격화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화요파는 비록 “10.2”사건에서 손실을 입기는 했으나 김찬의 지도밑에서 만주총국을 회복하였다. 후보위원으로 있던 리동산이 책임비서를 맡고 김성득(백파)이 조직부장을, 김홍선(김홍한)이 선전부장을, 최충호, 진허, 리우영 등이 위원을 맡았는데 이는 화요파일색의 만주총국이였다.
이에 박윤서는 조선공산당중앙에 화요파의 “전형행위”를 소송하고 엠엘파로 구성된 만주총국명단을 제기하였다. 당시 엠엘파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령도권을 장악하고있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책임비서 안광천(엠엘파)등은 1928년3월 화요파의 만주총국을 부정하고 엠엘파가 제기한 만주총국간부명단(책임비서 리경호, 위원 박기석, 박윤서, 김영식, 리순)을 비준했다. 동만도의 간부로는 김기석, 최종학, 김진탁, 리순, 동만도 공청회 간부로는 리정만을 선임하였다. 이러한 간부임명에 대해 화요파는 승인하지 않으면서 원래의 만주총국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동북지구에서 엠엘파총국과 화요파총국이 동시에 활동하는 국면이 초래되였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1927년 8-9월 서울파와 상해파는 련합하여 “재만조선공산주의동맹”을 결성, 리동환, 윤자영, 리운혁, 장도정, 최동욱, 김철수, 김영만 등으로 지도소조를 구성했다. 그리하여 3개파가 제마끔 만주총국을 세우고 활동하는 국면이 초래되였다.
북풍파의 일부 성원들은 비록 “10.2”사건에서 체포되고 수령인 김봉익도 울라지보스또크로 피신간 정황이였으나 한상묵, 류운섭, 최화봉, 황욱(황금달)등은 다시 일어나 조직을 회복하였다. 11월 중순 그들은 한상묵을 책임비서로 하는 북풍파당조직을 성립하고 울라지보스또크에 피신해있는 김봉익과 련계를 달아 임무를 접수하였다. 북풍파에서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련계가 없이 자체로 조직을 확대발전시켜나갔다. 그들은 “민성보”에 문장을 발표하고 삐라를 살포하는 등 수단으로 자본주의의 죄악을 폭로하고 조선족군중을 선동하여 사회주의혁명에로 궐기시켰다. 1928년에는 “5.1”절을 계기로 반일강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그들의 활동을 감시해오던 일본경찰들은 5월10일 밤 8시30분에 수색망을 늘여 북풍파성원들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원래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북풍파는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비록 이렇게 각 파가 분립되여 령도권을 놓고 파쟁을 벌리기는 했지만 호상 불가상용하지 는 않았다”고 하면서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피력했다. “반일민족협동전선문제에 있어서 각파는 민족유일당조직을 창립하기 위하여 힘썼습니다. 또 반일투쟁에서 그들은 함께 일제의 침략죄악을 폭로, 친일조직과 밀정을 타격하였습니다. 혁명조직을 보위하기 위하여 서상파는 <적기단>을, 화요파는 <모험총대>를 조직하여 룡정, 길돈연선, 봉천, 할빈 등지에서 폭동을 계획했으며, 엠엘파는 룡정에서 <맹호단>, <철혈단>을 조직하고 폭동계획을 짰으며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훈련소를 밀산지구에 설립하려고 의연금을 모금하거나 친일대지주의 장원을 습격하는 투쟁을 벌렸습니다. 반봉건투쟁에서도 그들은 호흡을 같이 하였습니다.”
“제2차간도공산당사건”
맑스-레닌주의의 전파와 조선공산당조직이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연변에서의 청년운동도 생기발랄히 발전하였다. 연변지구에서의 청년운동의 비약적발전은 통일된 청년조직의 발족에 튼튼한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1926년1월25일, 동진청년회 등 20개 단체의 대표 28명이 룡정의 시천교강당에 모여서 동만청년총련맹의 창립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동만청년련맹의 강령을 채택했다. 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우리는 합리한 사회생활의 지적교육과 실지훈련을 목적으로 한다.
(2)우리는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대동단결에 힘쓴다.
(3)우리는 대중을 본위로 한 신문화의 향상에 힘쓴다.
총련맹의 간부진영은 다음과 같다.
림시의장 박재하
서기 김소연
규약기초위원 리주화, 김소연, 김소광
선언 및 강력기초위원 리린구, 김봉익, 주채희
집행위원 리주하 이하 15명
동만청년련맹은 창립된후 약 반년동안 독자적인 청년운동을 벌리다가 1926년10월 동만지역국과 고려공산청년회 구역국이 설치된후 직접 그 령도를 접수하게 되었다. 동만청년련맹은 연변지구청년운동의 구심점으로 되면서 조직확대와 회원흡수에 모를 박았다. 1928년1월1일에 정기대회에서 동만청년총련맹을 “동만청년총동맹”으로 개칭, 단일동맹수는 24개로 급속히 늘어났고 5000여명 회원이 있었다. 1928년8월 동만청년총동맹의 간부진영을 보면 중앙집행위원장, 중앙집행위원 22명가운데서 공산당원과 공청원이 13명이고 무소속은 9명뿐이였다. 이렇듯 동만청년총동맹은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이 령도하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산하의 표면단체였다.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조직에서는 1928년9월2일이 “국제청년일”인것을 기회로 산하의 가장 유력한 합법단체인 동만조선청년동맹을 동원하여 기념집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보가 일본총령사관에 탐지되여 대규모 검거체포되였다. 하여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책임비서 리정만을 비롯한 고려공산청년회 동만도간부와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 간부 51명, 동만청년총동맹 소속 및 기타 21명 총 72명이 검거투옥되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하여 연변지역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은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을 뒤이어 또 한차례의 준엄한 시련에 부딪쳤다.
동만청년총동맹도 문화부장 윤용준을 비롯한 12명의 간부를 잃는 비윤을 맞이하였다. 일제는 여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1928년10월 연변의 여러 지역에서 동만청년총동맹의 간부들을 검거투옥하기 위하여 지방치안을 파괴한다는 죄명을 들씌워 공개적인 단속에 나섰다. 이리하여 동만청년총동맹은 1928년10월에 일제의 탄압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그치게 되었다.
제3차간도공산당 사건
연변을 휩쓴 반일학생시위
1929년1월, 조선 광주에서 대규모적인 학생반일투쟁이 일어났다. 광주학생들이 지펴올린 반일의 봉화는 료원의 불길마냥 서울, 대구, 부산, 평양 등지에서 세차게 타올랐으며 연변에도 파급되여왔다. 연변 각지 조선족학생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밑에서 광주학생들을 성원하는 반일시위투쟁을 단행했다.
11월26일(1929년), 화룡사립약수동학교의 학생들은 사립룡평학교, 투도구의 사립신흥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단행, 투도구거리에 떨쳐나섰다.
1930년1월, 대립자의 현립1교와 사립명동학교의 학생들은 대립자현소재지(당지 화룡현소재지는 대립자에 있었음)의 거리를 메우며 지나갔다.
1930년1월23일, 룡정의 각 중학교에서도 동맹휴학을 단행, 거리로 뛰쳐나갔다. 학생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적인 지휘밑에 살을 에일듯한 풍설을 무릅쓰고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학생들은 태극기와 수기를 흔들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광주학생사건으로 검거된 학생들을 석방하라!", "일본제국주의의 민족멸시를 반대한다!", "노예교육을 반대한다!"는 등 구호를 높이 웨쳤다.
시위행렬이 일본령사관앞에 이르렀을 때 기마경찰들이 총칼을 휘드르면서 적수공권인 학생들에게 덮쳐들었다. 대성, 동흥, 은진 등 중학교의 학우회간부들인 리영식, 김창준 등 50여명 학생들이 당장에서 체포되였다.
이에 분노한 학생 1000여명이 은진중학교운동장에 다시 모여 성세호대한 성토대회를 열었다. 은진중학교는 영국조계지안에 있었으므로 일제경찰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동흥중학교, 명신녀자중학교, 대성중학교, 은진중학교의 학생들은 앞다투어 일제의 야만적만행을 규탄하면서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할 것을 강경히 요구하였다.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요란히 들리였다. 일제기마병 10여명이 조계지철조망밖에 다달아서 호각을 불어대면서 시위대오를 해산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학생들은 기마병들을 보는체만체하면서 계속하여 구호를 웨치면서 일제의 만행을 성토했다. 일제기마병들이 계속하여 호각을 불면서 야단치자 학생들은 철조망을 사이두고 경찰들과 향변했다. 분노한 학생들은 참을수 없어 철조망을 뛰쳐나가 기마병에게 덮쳐들어 박투를 벌리였다. 학생들은 기마병들을 말에서 끌어내려 엎드려놓고 반주검이 되도록 두들겨팼으며 놈들의 군도를 빼앗아 끊어놓고 옷과 모자를 찢어놓았다. 이것은 연변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이 무장한 일본경찰들과 맞다들어 박투한 반일행동이였다.
1월28일, 룡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선녀자중학교를 중심으로 한 수백명의 학생들은 수기를 들고 다시 영국조계지에 모여 반일성토대회를 가지였다. 분노한 학생들은 참을수 없어 거리에 몰려나가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했는데 여러 학교의 학생들도 자각적으로 이 시위대오에 가담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성원하는 투쟁은 2월달에도 계속 일어났으며 뒤이어 전 연변에 파급되였다.
대규모적인 민중시위
얼마전부터 조선공산당조직과 련계를 가지게 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에도 반제투쟁에 결부시켜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을 반일투쟁에 궐기시키기 위해 조선의 "3.1폭동" 11주년을 계기로 각지 당조직의 지도밑에 집회 또는 시위운동을 거행하여 민중들의 항일운동을 제고시키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에서는 1930년1월에 "3.1폭동" 11주년을 계기로 농민, 학생과 로동자들을 동원하여 대규모적인 민중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동만과 북만에 "<3.1폭동> 11주년기념준비위원회"를 각기 조직하여 시위운동을 령도하기로 결정, 선전부장 장주련(장시우)을 연변에 파견했다. 장시우는 연길현 수신향 래풍동(현재 화룡시 동성향 명풍촌)에 있는 조선공산당 평강구역국 책임비서인 유태순(후에는 중공 연화현 평강구위 조직부장)의 집에서 동만도(화요파)책임비서 윤복송, 조직부장, 강석준, 선전부장 한별 그리고 연변학생련합회의 간부인 리동선 등과 함께 동만도간부회를 소집하고 동만의 각 군중대표들로 "<3.1폭동> 11주년기념준비위원회"를 연변학생련합회, 동만조선인총년총동맹 등 대표 5명을 구성, 리동선이 총책임을 지고 표면지도를 하기로 하였다.
준비위원회에서는 각지의 민중들을 조직동원하는 한편 시위하는 당날 살포할 선전삐라와 수기 등을 만드느라 바빴다. 군중선동에 사용할 견문은 주로 장시우와 윤복송이 기안한 것을 선전부장 강시준의 책임아래 3월1일 전야까지 몇십종 약 30만장을 인쇄하였는데 장시우, 강석준, 윤복송, 한별 등은 유태순과 강만홍(박봉남 후에는 제1대 중공 밀산현위 서기)네 집에 기숙하면서 낮이면 움속에서, 밤이면 뒤방에서 등사기와 씨름했다. 유태순과 강홍만의 가족들은 붉은천과 흰천으로 수기를 만드느라 바삐돌아쳤다. 그들이 작성한 선전문가운데 중요한 것을 봄녀 "나가자 만세시위장으로!", "선언", "전 조선학생혁명자의 혁명적투쟁에 대하여 피압박대중에게 다시 고함" 등 이였다.
장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등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30여만장의 삐라와 수천폭의 수기를 동만 각지의 당, 단 세포에 배포하는 한편 직접 구두를 통하여 민중을 선동, 조직하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1930년2월28일 소오도구, 개척리, 대동구, 수평동, 이도구, 장인강 등지의 농민들은 투고구를 향해 행진하였다. 시워군중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독립 만세!" 구호를 높이 웨치면서 검은 글씨로 쓴 붉은색, 흰색의 작은 기를 흔들면서 성세호대하게 시위운동을 전개했는데 룡정, 두도구를 비롯한 전 간도는 마치 무장폭동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였다.
투고구일본령사분관 경찰들은 룡정총령사관의 군경들의 도움밑에 민중시위를 해산, 탄압하려고 미쳐날뛰였다. 3월1일 일제경찰들은 시위군중을 마구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하여 투도구령사관마당에는 체포된 농민과 학생들로 꽉 차게 되었다.
"체포된 시위군중가운데 문두찬이라는 장인강에서 온 15살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일제경찰놈들은 소녀를 얕잡아보고 주모자가 누구냐고 따졌으나 입을 꾹 다물고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성난 일본경찰은 소녀의 머리태를 거머쥐고 흔들면서 위협공갈했지요. 이에 문두찬소녀는 <새벽닭은 누가 시켜 우나요? 우리들도 때가 되니 일떠섰어요!>라고 야무지게 대답하여 일본경찰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경고>를 받고 석방되여 나온 문두찬소녀는 놈들이 감아쥐였던 자기 머리태를 보면 구역질이 난다고 가위로 뭉청 잘라버리고 단발머리를 만들었습니다. 소녀는 계속 혁명의 앞장에 서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한 소녀의 생동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당시 군중들의 혁명열정은 참으로 대단했다"고 말했다.
"제3차간도공산당사건"
시위에 동원된 군중들이 많고 기세가 대단한 것을 관찰한 "<3.1운동> 11주연기념준비위원회"에서는 보다 규모가 큰 민중폭동을 계획하였다. 3월5일 강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유태순, 리동선 등은 래풍동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이번 시위투쟁을 총화하였다. 결과 민중들을 궐기시켜 무장폭동을 일으킬수 있다고 결정하고 준비위원회를 "전동만폭동위원회"로 성격전환하였다.
폭동위원회에서는 조직, 선전, 규찰대, 경리, 출판 등 부서를 설치하고 조직책임에 리동선, 선전책임에 리철한, 규찰대책임에 김상근, 경리책임에 리병식, 출판부책임에 안평을 각기 임명하고 행동에 돌입하였다.
폭동위원회의 활약부서기가운데 규찰대가 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점이였다. 규찰대는 중앙대, 지방에는 지방대, 구역에는 구역대, 각 촌에는 부대를 설치하고 중앙대로부터 촌부대의 책임자는 모두 해당당조직의 주요간부들이 책임지고 령도하기로 하였다. 규찰대성원들은 민중단체의 골간분자들로 구성하고 각 촌분대성원들로 하여금 각지의 지하조직과의 통신련락을 담당하는 동시에 반동분자, 일제경찰과 그들의 앞잡이들의 행동을 정찰, 감시하고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폭동위원회는 민중혁명단체를 동원하여 무기와 자금을 장만하고 5월1일에 폭동에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중심간부들인 장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등은 표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조종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만폭동"계획은 3월하순 일제의 간동총령사관에 포착되여 검거되기 시작하여 5월중순까지 130여명이 체포되였다. 이것이 바로 "제3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체포된 사람중 49명은 서울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여 1931년2월5일부터 서울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의 "죄명"으로 공판을 받았는데 장시우는 10년, 윤복송은 9년, 강석준은 6년, 리병식은 8년6개월...언동 받았다. 리동선, 한별은 검거선풍에 걸리지 않았으나 훗날 "5.30폭동", "추수폭동"에 앞장서서 투쟁하다가 체포되여 한별은 혹형으로 사망하고 리동선은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대에서 피살되였다.
"한마다로 그번 폭동준비는 <좌>경모험주의의 그릇된 견해에 의해 지도된 행동이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관내토지혁명전쟁의 경험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맹동주의적인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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