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마고원의 식인표범
출처:풍산개소설
1939년 여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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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개마고원 웅이강(熊耳江) 상류 계곡. 산 속이라도 낮에는 푹푹 찔 만큼 계곡의 여름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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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다. 그곳에 두 젊은이가 사흘째 틀어박혀 산아래 계곡에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물길의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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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가 넓게 틔어 있는 계곡. 전형적인 개마고원의 지형이다. 그 중에도 웅이강 상류는 다른 곳<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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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넓은 계곡주변이 꽃으로 수를 놓은 듯한, 개마고원에서도 빼어나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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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두 사람은 이 꽃밭을 감시하고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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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옷차림은 산판 인부처럼 남루했다. 하지만 그들 곁에는 두 정의 38식 군용소총이 놓여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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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그들은 사냥꾼이 아니었다. 한명이 연방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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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해서 기어들 때도 된 것 같은데. 꽃들이 모두 져가는데 말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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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또 한 사람이 위로하듯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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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틀 더 기다려보십시다. 그 이상 지나면 저 꽃들이 거의 다 질거예요. 그 안에 꼭 나타날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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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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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경찰이었다. 한 사람은 조선인 이동선 경부, 다른 한 사람은 일본인 나카자와 순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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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조선에 소속되어 있는 일본경찰이 아니라 강 건너 만주국 경찰 소속이었다. 그들은 길림성의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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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청이 있는 명월구 경찰서에서 특수임무를 받고 나와 있는 중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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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감시하는 하얗고 빨간 꽃들은 야생화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중의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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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아주 청순하고 단정한 자태. 하지만 그 꽃은 깨끗한 청순함과 두려운 요염함을 함께 갖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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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경국지색(傾<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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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之色)인 귀비(貴妃) 양옥환(揚玉環)의 이름을 물려받은 꽃-양귀비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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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꽃이 지면 둥그렇게 부풀어 있는 꽃 밑동에서 하얀 액체가 나온다. 이 것을 굳히면 까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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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의 생아편이 된다. 이것이 바로 범죄자들이 목숨을 걸고 갖고 싶어하는 황금의 마물이었<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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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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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경관은 마약 범죄자를 추적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규모 아편 밀매조직인 청운방(靑雲幇) 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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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당영, 만주국 길림성 경무청이 대규모 수사력을 동원해 그를 뒤쫓고 있었는데 한 달 전쯤 안<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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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 경찰서에 그 꼬리를 잡히게 된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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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물건을 갖고 있는데 말이죠.….” 농민행색의 한 조선인이 명월구 약재상들을 일일이 찾<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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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니며 아편을 팔려고 했다. 함경북도 풍산에서 왔다는 그는 벽돌만한 아편덩어리를 가지고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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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그 무렵의 만주 약재상 중에는 비록 소규모지만 아편을 취급하는 곳이 많이 있었다. 덩<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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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째 팔려고 했지만 선뜻 사겠다는 곳이 없었다. 답답했던 그는 한 약재상에서 명월구의 현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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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縣民)이라면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있어 누구나 알고 있는 당영의 소재지를 묻는 실수를 저지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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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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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 아편 밀매자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신고를 해버렸다. 풍산촌민은 즉시 검거됐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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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색이 새파래진 채로 경찰서에 끌려와 횡설수설 하며 발뺌을 했지만 그냥 놔둘리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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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 살살 다뤄서는 안 되겠는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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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는 맵디 매운 쇠좆매를 휘둘렀다. 쇠좆매란 수소의 생식기를 잡아 늘려가며 말린 다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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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철사로 촘촘히 매어 만든 것으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용 회초리였다. 쇠좆매는 만주국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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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뿐만 아니라 조선의 일본 경찰들도 고문도구로 사용해 조선전체에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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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숙한 풍산촌민은 머리를 쇠좆매로 얻어맞아 피멍든 혹이 서너 개 생기고 나서야 모든 것을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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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았다. 그는 개마고원의 한 산촌에 살고 있었는데 그 일이 있기 1년 전 동네사람들과 함께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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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 양귀비를 일구어 아편을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그 산촌과 줄을 대고 있던 구매자와 연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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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끊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아편덩어리를 두고 고민하다가 몇 년 전 당영과 거래를 한 적이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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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 사람을 만주로 들여보내 판매하기로 했다. 그때 그는 당영의 명월구 연락처와 주소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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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아편을 가지고 만주로 들어온 것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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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명월구에 와보니 당영의 행방이 묘연했다. 당영은 포위망을 피해 봉천으로 줄행랑 친 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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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였다. 그는 아편을 갖고 돌아갈 수도 없어 약재상들을 찾아다니며 처분하려고 했고 당영의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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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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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촌민은 꼼짝없이 대규모 아편밀매조직의 한 명으로 몰리게 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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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쇠좆매의 호된 맛까지 봐야했다. 경찰은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는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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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알지도 못하는 당영과 공범으로 몰리는 누명만큼은 벗어야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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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십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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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촌민은 한번씩 후려칠 때마다 머리는 물론 온몸에 피멍이 드는 쇠좆매를 맞을 이유가 없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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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생각했다. 당영에 대한 조그만 단서라도 경찰에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경찰서장 혼다가 직<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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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 그를 취조했다. 혼다는 그가 전문밀매업자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서 당<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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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가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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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서 산을 서너 개만 넘어가면 큰 아편 밭이 있습니다요. 그 밭은 당영이 화전민들을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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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 경작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그의 말에서는 경찰에 쫓기느라 영업부진에 시달리게 된 당<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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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아편을 생산하는 데까지 손을 대고 있고 원료 확보는 주로 조선 땅<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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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하고 있다는 정보와 일치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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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아편 수확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혼다서장은 아편수사를 전담 하고 있던 이동선과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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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를 개마고원으로 파견했다. 이것이 바로 나무꾼들도 잘 다니지 않는 그 심산유곡에서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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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흘째 잠복하게 된 연유였다. 이동선은 당영 일당이 양귀비를 수확하기 위해 나타나면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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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지서로 내려가 강건너 명월구 본서에 증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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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지났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기울기 시작할 무렵. 미숫가루로 점심을 때운 이동선은 연방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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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을 쏟아냈다. 지겨운 잠복근무를 짜증스러워하며 찾아오는 졸음을 쫓기 위해 망원경을 들었<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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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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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멀리 계곡 끝을 돌아 들어오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렌즈에 잡혔다. 옷차림은 평범했지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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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선은 ‘왔다’고 느꼈다. 거리가 멀어서 두 물체는 희미하게 보였다. 그들의 행동은 예사롭<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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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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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이 양귀비꽃밭에 들어가더니 허리를 굽히고 꽃을 하나하나 살펴나갔다. 그는 다른 밭에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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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당영이나 당영의 부하가 틀림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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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타나셨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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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 범죄자들과 숱하게 맞닥뜨려 싸워온 이동선의 가슴속이 순식간에 동물적인 투지로 활활 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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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점점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확실히 보였다. 그들 중 한 사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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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여자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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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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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당영의 부하가 아니라 당영 부부가 아닌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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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 때 양귀비 밭은 경찰뿐만 아니라 비적떼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편업자들은 수확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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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무장경비원을 투입해 주변을 수색하고 24시간 내내 경비를 했다. 당영 같은 거물이 직접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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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것은 뜻밖이었다. 이동선, 나카자와 두 경찰의 이번 잠복작전도 당영의 심복이나 조직책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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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 잡으면 성공이라고 여긴 터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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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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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마지막 양귀비 밭을 살펴보고는 옆으로 빠져나가 굽이진 계곡 구석에 짐을 풀었다. 남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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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바위 위에 차일과 모기장을 쳤다. 여자는 계곡 한편에 돌을 쌓고 냄비를 걸었다. 50여m 떨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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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거리였지만 이동선의 망원경에서는 그들의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남자는 체구가 장대하고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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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복숭이 같은 수염이 붙어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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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작지만 몸놀림이 아주 민첩했다. 수배전단을 작성했을 때 인상과 똑같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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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틀림없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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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선은 나카자와에게 저들이 당영 부부라고 단언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빨리 산을 내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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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명월구에 병력을 파견해달라는 연락을 해야 했다. 당영의 출현에 놀라서 안절부절하는 나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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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와에게 이동선은 속삭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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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이 저렇게 단촐하게 나타날 리가 없어. 더구나 지금은 양귀비 수확기야. 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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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둘로는 저놈을 잡을 수가 없단 말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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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선은 적어도 2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서두르면 내일 새벽까지는 본서에서 대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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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는 병력을 끌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카자와에게 하룻밤동안 꼼짝하지 말라고 다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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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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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세 살의 나카자와는 연방 떨고 있었지만 애써 용기를 보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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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다녀오십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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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선은 38식 소총을 나카자와에게 맡기고 남부식 8㎜ 권총만 가진 채 뒷산을 넘어 깊은 숲 속<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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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사라졌다. 나카자와는 이동선이 사라질 때부터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얼마나 흘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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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까. 나카자와는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꼈다. 그제서야 나카자와는 자신이 꼼짝 않고 서너시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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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망원경을 보고 있었음을 알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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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겁을 먹고 있지”라며 그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때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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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차일 밖으로 나왔다. 천 조각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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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에 요지경처럼 클로즈업 된 여자의 알몸은 눈부실 정도로 희였다. 목을 감는 머리카락과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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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넓다싶은 하복부의 숲은 칠흑처럼 검어 살결이 더욱 희게 보였다. 피부가 반짝반짝 비치는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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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보아 격렬한 정사로 온몸에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여자는 물보라를 뿌리며 계곡 웅덩<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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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뛰어들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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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처럼 물장난을 치던 여자가 큰소리를 질렀다. 온 몸이 털로 덮인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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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아랫도리를 덜렁이며 물 속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입맞춤을 한 채 서로의 몸을 씻어주었<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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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둘의 부드러운 물마사지는 얼마 가지 않았다. 서로의 손과 입술이 점점 거칠어지더니 두 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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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은 계곡바닥의 넓은 바윗돌 위에서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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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자에게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 엎드리게 한 다음 뒤에서 야수같이 무자비하게 공격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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댔다. 개마고원의 웅장한 계곡은 연속적인 외마디 울부짖음의 메아리로 뒤덮였다. 눈앞에 펼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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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광경에 총각 나카자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랑의 행위를 끝낸 두 사람은 차일 밑으로 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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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갔다. 어둠이 깔릴 무렵 여자가 다시 나와서 저녁을 짓기 시작했다. 남자가 나카자와의 시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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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나타난 것은 밥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들은 척<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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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하지 않고 앞의 숲 속으로 걸어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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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으로 들어간 남자는 웬일인지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불안한 듯이 남자를 불렀지만 대답<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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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었다. 여자는 안절부절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여자도 남자를 찾아 숲 속으로 들어갔다. 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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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분쯤 지났을까. 여자가 되돌아왔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땅거미가 여자의 모습을 가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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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했다. 나카자와는 숲 속에 들어가서 종적을 감춘 남자의 행적이 괴이했지만 얼마 전 정<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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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광경을 본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더 이상의 추리를 할 수가 없었다. 새울음이 밤벌레소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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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바뀌고 계곡 물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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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는 그제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와 밤을 어떻게 지샐 것<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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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별안간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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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치 서우 쩐치라이! (손들고 일어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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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서리가 쳐질 만큼 살기 돋친 목소리였다. 10m쯤 뒤에서 당영이 권총을 겨누고 서 있었다. 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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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두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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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는 본능적으로 손을 더듬거리며 옆에 놓아둔 남부 권총을 찾았다. 하지만 당영의 권총<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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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고 그의 고함 한마디에 나카자와는 아무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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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쩌쓰?(죽고 싶나?)”<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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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는 뒤돌려 세워져 몸을 샅샅이 수색당했다.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이 나왔다. 만주국 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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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의 신분증이 끼워져 있었다. 당영은 누런 이를 드러낸 채 비열하게 웃으며 빈정거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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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우 짜이스만 셴재이 쉬이빨 꿔지앙! (이제는 개들이 강까지 건너다니는구나!)”<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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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영은 나카자와를 발길로 걷어차 맨 땅에 꿇어앉혔다. 나카자와가 일본에서 만주로 건너온 것<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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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겨우 6개월 전이었다. 그는 신참 경찰이었고 중국어도 몹시 서툴렀다. 당영은 말이 안 통하<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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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에게 취조는 커녕 대화조차 할 수가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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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 옆에는 두 정의 38식 소총이 있었다. 당영이 나카자와를 발견하기 직전 또 한 명의 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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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언제 증원군이 달려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당영은 오른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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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쥐고 있던 무거운 모젤 권총을 어루만지며 잠시 망설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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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젤 권총은 1896년에 나온 구식 권총이었다. 자동권총이 나올 때까지 공산권, 특히 중국에서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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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인기를 끌던 총이다. 훗날 북한의 김일성이 청년시절 소위 ‘이종락부대’라 불리는 반 비적<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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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를 따라다니며 암살 행동대원 노릇을 할 때 애용하던 바로 그 모젤 권총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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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영은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젊은 아내와 향락을 즐기러 온 이 별천지에서 살인을 하기 싫<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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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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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나 일본친구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당영은 3년 전 하얼빈에서 아편을 거래하다가 현장을 덮<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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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 경찰관 3명을 살해한 적이 있었다. 붙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이 뻔했다. 한 명을 더 죽인다고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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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질 것이 없는 운명이었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죽어줘야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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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영은 나카자와의 뒤통수에 찌르듯이 총신을 겨눴다. 그리고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짧은 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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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음이 났다가 메아리속에 금세 사라졌다 .스물 세 살의 일본인 경찰은 개마고원 깊은 계곡 속<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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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허무하게 생애를 마쳤다. 당영은, 나카자와가 죽었음을 확인하고 그의 지갑과 남부 권총<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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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챙겨든 채 아내가 있는 산밑으로 달음질하듯 내려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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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모래 같은 별하늘과 개똥벌레 불빛과 함께 여름밤이 소리 없이 찾아왔다. 이미 영혼이 떠나버<br>
<br>
린 나카자와의 육신이 차갑게 덮여지고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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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선이 나카자와를 혼자 두고 증원군을 부르러 간 것은 결과적으로 실수였고 동료의 허무한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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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초래했다. 상황 판단 미스는 당영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만 아니었어도 당영은 평소대로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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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을 이끌고 왔을 것이고 몇시간 뒤 끔찍한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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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둘이 호젓한 곳에 가서 여름휴가라도 즐기고 싶어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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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와 은신 생활에 지친 아내는 당영에게 매일 졸라 댔었다. 당영은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생<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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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을 수확할 때가 돼 겸사겸사 휴가를 즐기기로 하고 아내와 단둘이 이 개마고원의 양귀비 밭<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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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찾아왔던 것이다. 당영이 나카자와가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수많은 사선을 넘나<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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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면서 몸에 밴 보호본능 때문이었다. 그는 광야를 누비는 범죄조직의 보스답게 밖을 나갈 때면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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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36배율의 영국제 망원경을 갖고 다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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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놋쇠 망원경은 라디오 안테나처럼 길게 잡아 빼어 한쪽 눈에 대고 봐야 하는 구식이었지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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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능은 기대한 만큼 충분히 발휘했다. 당영은 양귀비 계곡에 진입할 때부터 이미 이 망원경으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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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샅샅이 정찰하고 있었다. 시냇가에서 아내와 사랑을 나누고 누워 있을 때 거리가 멀어 <br>
<br>
계곡 입구에서 잘 살피지 못했던 안쪽 사면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앞에 있는 숲으로 <br>
<br>
들어가서 또다시 망원경으로 정찰을 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나카자와의 은신처가 그의 눈에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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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고 말았던 것이다.<br>
<br>
당영은 아내에게 내려오자 마자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br>
<br>
“빨리 짐을 싸야 해. 이 밤 안으로 조선을 빠져나가야 하니까.”<br>
<br>
당영의 아내 쌍매(雙梅)는 사태를 눈치채고 급히 짐을 꾸렸다. 그들은 10분도 안돼 아까 왔던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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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아닌 다른 길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이었지만 여기저기에 피어난 양귀비꽃이 하얀 <br>
<br>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봄부터 그들이 큰 기대를 품고 가꿔온 양귀비였다. 수확하러 왔지만 지<br>
<br>
금 이들 부부에게 아편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양귀비가 귀하더라도 하나밖에 없는 목숨과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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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수는 없었다. 웅이면 면소재지 늪평의 외딴 농가에는 그들이 혜산진에서부터 타고 온 하이<br>
<br>
아(택시)가 숨겨져 있었다. 조심성 많은 당영이 양귀비 수확이 끝나는 2주간 동안 전세낸 차였<br>
<br>
다. 늪평에 도착하면 그 차를 타고 두만강가로 가서 그 밤 안으로 조선을 빠져나갈 작정이었다.<br>
<br>
두 부부는 발 밑이 잘 분간되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계곡을 타고 한 시간을 내려간 끝에 굵직한 <br>
<br>
소로(小路)로 접어들게 되었다. 소로의 양옆은 장벽 같은 낙엽송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달<br>
<br>
빛을 도움 삼아 가며 걸은 지 두 시간이 넘었을 때였다. 거의 자정에 가까워 있었다. 그들은 언<br>
<br>
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당영은 걸음을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왼팔을 뻗어 새근대며 힘겹게 <br>
<br>
뒤따라오는 쌍매를 안아주며 격려했다.<br>
<br>
“한시간만 더 걸으면 돼. 마을이 나오지.”순간 당영의 끝말이 쌍매의 공포에 질린 외마디에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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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버렸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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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br>
<br>
쌍매<br>
<br>
의 공포 어린 시선은 당영을 지나쳐 앞쪽을 향해 있었다. 바로 앞 오르막 길 끝에 시퍼런 두 개<br>
<br>
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공포에 휩싸인 나머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리고 <br>
<br>
말았다. 당영은 가슴을 안정시키려 애쓰며 권총을 꺼내고 두 불빛을 향해 겨누었다.<br>
<br>
“호랑이야.내 뒤에 숨어!”<br>
<br>
그 불빛은 10초쯤 후에 옆의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br>
<br>
다. 방금 살인까지 한 당영이었지만 등에는 식은 땀이 연방 흘러 내렸다. 피곤함이고 뭐고 이젠 <br>
<br>
빨리 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둘은 살얼음판을 걷듯 숨을 죽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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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m도 가지 않았는데 그 불빛이 다시 왼쪽 숲 속에 나타났다. 이번엔 아예 거리를 두고 따라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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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했다. 당영은 달빛에 얼핏 노출된 그 동물이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이라는 것을 알아챘<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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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공포심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사색의 쌍매가 허리에 매달렸기 때문에 당영은 걷기조차 힘<br>
<br>
들 지경이었다. 표범은 점점 대담해졌다. 어떤 때는 대여섯 걸음 뒤까지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 <br>
<br>
했다. 표범은 두 사람을 공격목표로 삼은 게 틀림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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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버려야겠어!”그는 표범이 덮치기 전에 공격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투경험이 많은 그는 선<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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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격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조금 더 가자 숲의 나무들이 듬성듬성한 곳이 나왔다. 나무 사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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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쏟아지는 달빛에 표범의 전신이 또렷이 보였다. 당영은 그곳을 결투의 장소로 잡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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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영은, 허리에 늘어붙은 쌍매를 달래서 먼저 앞으로 가라고 했다. 쌍매가 열댓 걸음 멀어지자 <br>
<br>
당영은 길 위로 올라온 표범의 두 눈 사이를 겨냥했다. 하지만 달빛 아래에서 목표물을 정확히 <br>
<br>
조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야간사격에는 정확한 조준이 아니라 목표물을 넓게 잡는 지향<br>
<br>
사격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영이 처한 비상상황에서는 일격에 표범의 급소를 명중시켜서 <br>
<br>
즉사시키는 정확한 사격만이 요구됐다. 하지<br>
<br>
만 당영은 대강 표범의 눈언저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모젤 권총 특유의 날카로운 총성이 <br>
<br>
어둠을 뒤흔들었다. 표범으로부터 짧은 비명이 이어졌다.<br>
<br>
두 번째 총성이 터졌다. 첫번째 총알에 귀를 맞은 표범이 번개 같이 도약하여 당영을 덮치자 반<br>
<br>
사적으로 총을 쏜 것이다. 두 번 째 실탄은 어두운 하늘을 꿰뚫고 사라져버렸다. 두번째 총성과 <br>
<br>
찰라의 간격을 두고 당영의 처참한 비명이 겹쳤다.<br>
<br>
표범은 전형적인 습격방법으로 당영을 덮쳤다. 표범은 공격 때 온몸의 치명적인 무기들을 집중<br>
<br>
하여 상대에게 일격을 가한다. 날카로운 이빨과 네 발의 발톱들은 한꺼번에 당영의 생명을 찢어 <br>
<br>
발겼다. 그리고 결정타로 뒷다리의 긴 발톱으로 당영의 복부를 갈갈이 찢어놓았다. 당영이 표범<br>
<br>
을 껴안고 뒹구는 동안 배 안에서는 창자가 쏟아져 내렸다.<br>
<br>
“글렀어….” 당영의 의식이 가물가물 멀어져 갔다. 그 와중에도 당영은 있는 힘을 다 내어 <br>
<br>
외쳤다. “쌍…매! 빨리…도…망가!<br>
<br>
머리를 물고 있었던 표범 이빨은 이제 저항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의 목줄기로 향하고 있었<br>
<br>
다. 당영은 자신의 목줄기가 거<br>
<br>
<br>
<br>
손경 위의 물음에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로를 쳐다보았다.<br>
<br>
"아니, 그러면 그저께 밤에 본 그것이?”박포수가 다그쳤다.<br>
<br>
“그래 뭘 봤소?”<br>
<br>
“사실은 말이죠….” 한 사람이 나서서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틀 전 밤. 벌목하느라 피<br>
<br>
곤에 지친 그들은 모깃불을 피워놓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갔었는<br>
<br>
데 녀석이 별안간 숨넘어가는 소리로 짖어댔다. 그러더니 그들이 누워 있는 곳으로 비집고 들어<br>
<br>
와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춘 채 벌벌 떠는 것이었다.<br>
<br>
맹수가 나타난 것이 틀림 없었다. 그들은 작대기와 도끼를 찾아들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br>
<br>
때였다.<br>
<br>
“저것 좀 봐!”<br>
<br>
한 사람이 강 건너 숲 속을 가리켰다. 파란 두 개의 불빛이 숲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br>
<br>
당영 부부를 전율케 했던 것과 똑같았다. 그들은 모깃불에 나무를 던져 넣었다. 가물거리던 모<br>
<br>
깃불이 일순간 환한 모닥불로 타올랐다. 그들은 번갈아 망을 보면서 꼬박 밤을 새웠다.<br>
<br>
박포수가 물었다.<br>
<br>
"개는 어떻게 됐습니까?”<br>
<br>
"다른 일행 세 명이 데리고 딴 길로 먼저 떠났지요.”<br>
<br>
그들 일행은 원래 여섯 명이었다. 그들은 간이 뗏목을 타고 다시 약수천을 따라 내려갔다. 손<br>
<br>
경위 일행은 뭔가 기대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강을 따라 올라갔다. 2㎞쯤 올라가자 아까 그 벌<br>
<br>
채꾼들이 노숙했다던 장소가 나타났다. 일행은 징검다리 건너편에 있는 숲을 수색하기로 했다.<br>
<br>
“여기 있다!”<br>
<br>
이남식이었다. 그는 축축한 강 언덕에서 매화무늬의 표범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일행은 두 <br>
<br>
시간 동안 그 일대 숲 속을 수색했다. 그러나 역시 표범이 남겨놓고 간 발자국은 몇 개 되지 않<br>
<br>
았<br>
<br>
다. 표범은 강을 타고 오르다가 사람들을 발견하고 강 건너 숲속으로 올라간 것이 분명했다. 그<br>
<br>
리고 300m쯤 가다가 사람들이 안 보이는 지점에서 다시 약수천가로 내려간 듯했다.<br>
<br>
그곳의 약수천은 상당히 폭이 좁아져 있어 작은 계류에 지나지 않았다. 표범은 이 계류를 타고 <br>
<br>
계속해서 상류로 올라가고 있었다. 손경위 일행은 계속 추적하고 싶었지만 해가 너무 기울어 있<br>
<br>
었다<br>
<br>
“내일은 단서가 잡히겠지요.” 일행은 발길을 돌렸다.<br>
<br>
자정 무렵. 손경위는 세차게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처마 밑으로 낙숫물 듣는 <br>
<br>
소리가 요란했다.<br>
<br>
“제기랄….”<br>
<br>
옆에 누웠던 이남식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듯했다. 이 비에 표범 발자국이건 뭐 건 남아 <br>
<br>
있을 리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꼬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br>
<br>
가게 생긴 것이다.<br>
<br>
새벽이 되자 언제 비가 왔었느냐는 듯 하늘이 말갛게 개어 있었다. <br>
<br>
"자, 기운들 냅시다.” 박포수가 침울한 분위기를 깨뜨리며 말했다.<br>
<br>
“표범은 북수백산이 아니라 백산이나 동적산 쪽으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놈이 만일 북수백산 <br>
<br>
쪽으로 갔다면 곧바로 산길을 타고 산판을 우회해서 올라갔지, 이렇게 계곡으로만 장거리를 이<br>
<br>
동할 리가 없거든요. 놈은 자기만 아는 안전한 길로 돌아서 두 산 중의 하나로 사라졌을 겁니<br>
<br>
다.”<br>
<br>
박포수의 결론은 확고해 보였다.<br>
<br>
“손경위님. 풍산군 지도 좀 봅시다.”<br>
<br>
박포수는 안경을 꺼내 쓰고 손경위에게서 받은 지도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동적산과 백산 언저<br>
<br>
리를 찬찬히 살피며 동그라미 다섯개를 그려넣었다. 박포수는 비록 신식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br>
<br>
지도를 읽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구한말 한성 시위대에서 2년간 군생활을 한 특이한 경력<br>
<br>
의소유자였다. 독도법도 그때 터득했다. 박포수가 일행을 쳐다보며 말했다.<br>
<br>
“발자국을 따라가서 빨리 결판을 내려 했는데 힘들게 됐습니다. 이제는 약수천 건너에 있는 백<br>
<br>
산과 동적산으로 가서 놈이 서식할 만한 장소를 일일이 수색해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역시 땀<br>
<br>
을 흘려야 표범을 잡을 수 있을 듯 하군요.”<br>
<br>
박포수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br>
<br>
“여기 이 두 산은 다행히 내가 지난 30년간 자주 사냥을 하던 곳<br>
<br>
입니다. 여기 표시해둔 다섯 곳은 그간 내가 개마고원에 살면서 발견했던 호랑이나 표범들의 서<br>
<br>
식지이지요.” 박포수는 힘주어 말했다.<br>
<br>
“비 때문에 땅이 물러져 오히려 표범 발자국이 분명하게 찍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말을 마<br>
<br>
친 박포수는 총각을 불렀다.<br>
<br>
"봉팔이가 아직도 저 산에 살고 있나?”<br>
<br>
총각이 고객를 끄덕이며 대답했다.<br>
<br>
물론입죠. 두 달 전에도 저희 집에 와서 이틀간이나 자고 갔는데요.”<br>
<br>
봉팔이가 누굽니까?” 손경위가 물었다. 박포수는 한숨부터 쉬었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br>
<br>
다.<br>
<br>
“일본인 순사를 두들겨 패고 산으로 도망간 녀석이지요.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원래 건달기<br>
<br>
가 있었는데 산에 들어가서도 그 짓을 못버려 행패가 심한 모양입디다.”<br>
<br>
손경위는 좀더 자세한 사연을 듣고 싶었지만 박포수가 말머리를 돌렸다.<br>
<br>
“사냥철이 아니니까 그 녀석과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신경쓰지 말고 출발하지요.”<br>
<br>
손경위는, 박포수가 뭔가 숨기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어제도<br>
<br>
“강을 건너 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말했다가 얼버무리지 않았던가. 분명 봉팔이라는인물<br>
<br>
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틀림 없었다. 손경위는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일행은 곧 출발했다. <br>
<br>
총각도 어제처럼 주먹밥이 든 망태를 짊어지고 따라 나섰다. 목적지는 해발 2천4백76m의 백산이<br>
<br>
었다. 일행은 약수천의 징검다리를 건너 새벽이슬을 밟고 한참을 걸어갔다. 해가 중천에 걸릴 <br>
<br>
무렵쯤 표범이 은신할 만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호랑이나 표범이 살기에 아주 적합한 지형<br>
<br>
을 하고 있었다. 이 두 맹수들은 우선 전망이 좋고 남향인 곳을 좋아한다. 여기에 더하자면 바<br>
<br>
위가 많아 은신하기 좋은 곳,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덤불이나 잡목이 우거진 곳을 좋아<br>
<br>
한다.<br>
<br>
사람이 다니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 이들의 은신처인 것이다.<br>
<br>
첫번째 수색한 지역은 위의 특징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 네 사람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br>
<br>
찔레가시에 할퀴고 찢기며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지만 표범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표<br>
<br>
범은 원래 낮에는 자고 밤에 사냥을 다닌다 .비록 어제 자정께 비가 오기는 했지만 새벽에 은신<br>
<br>
처로 돌아간 흔적은 남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젖은 땅 위에는 오소리, 너구리, 노루 발자국만 <br>
<br>
무성했다. 점심 때가 훨씬 지났을 때 박 포수가 수색을 중단시켰다.<br>
<br>
"작은 동물들이 이처럼 많이 사는 것을 보니 이 근처에는 표범이 없는 것 같군요. 이런 동물들<br>
<br>
은 절대 표범 사는 곳에는 없습니다.”<br>
<br>
두 번 째 지점을 수색하는 데는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면적도 넓지 않았고 지형 또한 비<br>
<br>
교적 평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놀랄 만한 것이 하나 발견되었다. 바로 벼락틀이었<br>
<br>
다.<br>
<br>
벼락틀이란 통나무를 뗏목처럼 엮어서 한쪽 끝을 들어올리고 그 밑에 미끼를 놓아둔 것을 말한<br>
<br>
다. 짐승이 미끼를 건드리면 위에 있던 통나무들이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쏟아져 압살하기 때문<br>
<br>
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br>
<br>
이 틀은 주로 호랑이나 표범을 겨냥하여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효과를 높이기 위해 통나무 <br>
<br>
틀 위에 큼직한 바윗돌이나 흙가마니를 얹어두는 경우도 많았다. 보기에는 엉성했지만 고양이족<br>
<br>
들은 놀라울 만큼 쉽게 걸려들었다(60년대에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던 원로수렵인 이상오씨는 구<br>
<br>
한말에 남한에서 호랑이가 멸종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를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된 벼락틀 때<br>
<br>
문이라고 주장했다). 벼락틀은 그곳 밀렵꾼들이 자주 이용하는 도구였다. 벼락틀을 살펴보던 박<br>
<br>
포수가 중얼거렸다.<br>
<br>
“봉팔이가 표범을 노리고 있군요. 오래되긴 했지만 이 근방에 표범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br>
<br>
다.”<br>
<br>
희망이<br>
<br>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br>
<br>
“자,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내일 다시 와봅시다.”<br>
<br>
박포수가 돌아서며 말했다. 사방이 거대한 산들에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서 해도 금세 기울어가<br>
<br>
고 있었다.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했다.<br>
<br>
일행이 숲 속을 벗어나 막 안수천이 내려다보이는 개활지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앞장 서 가던 <br>
<br>
총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앞에 괴상한 형색의 거한이 길을 가로막고 서서 일행을 <br>
<br>
쳐다보고 있었다.<br>
<br>
손경위도 작은 키가 아닌데 그는 목 하나가 더 붙어 있는 듯 장대했다. 게다가 등을 덮을 만큼 <br>
<br>
긴 머리에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었다. 삼베로 만든 짧은 잠방이와 소매 없는 저고리를 <br>
<br>
입고 있어 몸집이 더욱 커 보였다.<br>
<br>
그의 팔뚝에는 매 한마리가 얹혀 있었는데 아직도 털갈이가 끝나지 않은 놈 같았다. 매사냥을 <br>
<br>
즐기는 사람은 여름에는 매를 사냥 길에 데리고 가지 않는 법이다. 매는 고니나 기러기같이 북<br>
<br>
쪽에서 날아오는 철새이기 때문에 봄부터 초가을 사이에 잘못 날리면 본능이 시키는 대로 북쪽<br>
<br>
으로 날아가 버릴 염려가 있었다.<br>
<br>
게다가 여름철에는 털갈이를 하기 때문에 쥐나 개구리를 잔뜩 잡아 먹이고 쉬도록 해주어야 했<br>
<br>
다. 그런데도 매를 데리고 나왔다면 사냥기술이 좋거나 성격이 잘못된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br>
<br>
일행은 갑작스런 거한의 출현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먼저인사를 건네는 것이<br>
<br>
었다.<br>
<br>
“아바이, 오랜만이야요! 만주로 가셨다더니 웬일이십네까?” 건방진 말투였다. 손경위는 직감<br>
<br>
적으로 그가 봉팔이라고 느꼈다. 박포수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복잡한 표정이었다.“봉팔이였구<br>
<br>
나. 건강은 괜찮으냐? 이제는 산에서 내려올 때도 된 것 아냐?”<br>
<br>
봉팔이 박포수 곁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봉팔은<br>
<br>
아까부터 두 사람이 메고 있는 군용총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br>
<br>
아바이, 저 사람들은 뉘기요? 경찰이오?”<br>
<br>
“아니다. 만주에서 오신 직업 포수들이다.”<br>
<br>
“군대가 쓰는 총을 가졌는데요?”<br>
<br>
“만주에서는 민간인 포수도 저런 총을 가질 수 있지.”“그래요? 이 여름철에 뭘 잡으려고 왔<br>
<br>
소?”<br>
<br>
“….표범.” 박포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br>
<br>
“뭬요? 표범? 아니,표범이 어쩌기라도 했시오?”“이분의 친척이 표범에게 잡혀 먹었단다. 그<br>
<br>
래서 여기까지 오시게 됐지.”<br>
<br>
"표범이 사람을 죽였시오?”<br>
<br>
“두 사람이나 죽였어. 뭐, 표범에 대해 아는 것은 없나?”<br>
<br>
봉팔은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고개를 저었다.<br>
<br>
“표범 같은 것은 이 산에 한 마리도 없시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산에 표범은 없시오. 헛수<br>
<br>
고 말고 다른 산이나 찾아보시라요. 이 산에 있는 짐승들은 내 밥줄이오. 아무도 손댈 수 없시<br>
<br>
오!!”봉팔은 옆구리에 매고 있던 망태에서 꿩 한마리를 꺼내 총각에게 던져주었다.<br>
<br>
“야! 내가 두달 전인가 너희 집에서 신세진 적 있지? 그 값이야! 오늘은 아바이 때문에 참겠지<br>
<br>
만 다시 또 여기에 나타나면 가만있지 않갔시오. 빨리들 내려가시라요!” 총각이 움찔하자 봉팔<br>
<br>
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br>
<br>
“빨리 내려가, 이 자식아!” 겁을 집어먹은 총각이 꿩을 주워들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박포수<br>
<br>
가 일행과 함께 하산하면서 소리쳤다.<br>
<br>
"이따 총각집으로 와라!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br>
<br>
봉팔이 코웃음을 치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br>
<br>
“그 고리타분한 얘기는 인제 질렸소! 나는 내 잘난 대로 살아갈 테니 빨리 가시기나 하시오<br>
<br>
!”<br>
<br>
봉팔이에게 쫓기듯 산을 내려온 일행은 저녁 내내 불쾌했다.<br>
<br>
저녁상을 물리자 총각의 어머니가 삶은 꿩고기에 개마고원의 특산물인 들쭉술을 내왔다. 들쭉은 <br>
<br>
안수면에서 많이 난다. 머루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작고 당도가 높아 술이나 과즙을 만드는데 주<br>
<br>
로 쓰인다. 취흥이 오르자 박포수가 봉팔이와의 인연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br>
<br>
가 궁금해하던 차였다.<br>
<br>
봉팔이 아버지는 박포수와 죽마고우로 역시 포숫일을 하고 있었다. 20년 전하지 무렵이었다. 두 <br>
<br>
사람은 녹용을 얻으려고 압록강을 건너 장백산맥으로 들어갔다. 그 무렵의 만주는, 비적들이 우<br>
<br>
글거리는 무법천지였다. 특히 그들은 녹용 사냥꾼을 자주 노렸다.<br>
<br>
두 사람은 사슴 두 마리를 잡아 녹용 두 짝을 챙긴 뒤 귀향길에 올랐다. 그런데 장백산맥을 벗<br>
<br>
어나기 직전 비적 다섯 명에게 기습을 당했다. 그때 봉팔이 아버지는 첫 탄에 넓적다리에 관통<br>
<br>
상을 입었다. 박포수는 서둘러 지혈을 해주고 바위틈에 숨은 채 비적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그<br>
<br>
러기를 꼬박 하루. 박포수는 가지고 있던 러시아제 실탄 500발을 다 소비해야 했다.<br>
<br>
하지만 비적들은 역시 두 명사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음날 오후, 박포수가 우회해서 후방<br>
<br>
에서 기습하여 두 놈을 사살하자 나머지 비적들은 모두 도주해버렸다. 박포수는 곧장 봉팔이 아<br>
<br>
버지를 들쳐메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중국 한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게 했다. 봉팔이 아<br>
<br>
버지가 입은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br>
<br>
닷새가 지나자 봉팔이 아버지도 조금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박포수는 우마차를 빌려와 봉팔<br>
<br>
이 아버지를 태우고 압록강까지 와서 강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 태산진에서 우마차를 빌려 타고 <br>
<br>
개마고원이 보이는 갑산군까지 왔을 때였다. 봉팔이 아버지가 갑자기 고열과 함께 심한 경련을 <br>
<br>
일으키며 앓기 시작했다. 봉팔이 아버지는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박 포수의 손을<br>
<br>
잡았다.<br>
<br>
상철아. 아무래도 죽으려나 보다. 그간 의리를 생각해서 봉팔이를 잘 보살펴다오. 에미도 없이 <br>
<br>
자란 불쌍한 놈이야….”<br>
<br>
박포수는 울음을 참<br>
<br>
밥먹듯이 하다가 결국 소년원까지 가게 되었다.<br>
<br>
박포수는 죽은 친구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수도 없이 타일러보았지만 이미 머리가 커버린 봉팔은 <br>
<br>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br>
<br>
“그 따분한 소리 좀 그만 하시라요!” 세월이 흘러 풍산군민이 알아주던 불량소년 봉팔도 어느<br>
<br>
덧 구레나룻 무성한 어른이 되었다. 원래부터 아버지처럼 포수가 되고 싶어했던 그는 엽총 소지 <br>
<br>
허가를 받을 나이가 되자 무라다(村田) 단발 엽총을 한정 사서 허가신청을 냈다. 하지만 전과자<br>
<br>
에불량배인 그에게 엽총 소지 허가가 날 리가 없었다. 포수의 꿈이 무산된 봉팔은 더욱 난폭해<br>
<br>
졌다.시기심인지 열등감 때문인지 이번에는 인근의 동리에 사는 포수들만 골라서 폭행을 하기 <br>
<br>
시작했다.<br>
<br>
“우리도 마냥 그 어린놈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소!”<br>
<br>
“맞아요. 녀석을 잡아다가 단단히 족을 쳐야 해요.”<br>
<br>
기개 높은 풍산 포수들은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원로포수들이 모여 따끔히 혼내주기로 결정<br>
<br>
한 것이다. 물론 박포수는 괴로운 심정에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봉팔은 술해 <br>
<br>
취해 자고 있다가 스무명이 넘는 포수들에게 보쌈을 당했다. 원로포수들은 동네 정자에 그를 꿇<br>
<br>
어앉히고 이제까지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한뒤 징벌을 명했다.<br>
<br>
“저 놈을 당장 멍석말이해라!”<br>
<br>
봉팔은 그날 밤 멍석에 둘둘 말려 피멍이 들도록 호된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 봉팔은 몽둥이로 <br>
<br>
수십대나 얻어맞은 끝에 결국 장독에 최고라는 묵은 똥물을 마셔가며 한 달 간이나 드러누웠다. <br>
<br>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던가. 봉팔이 다시 몸을 추스르고 다시 나다니기 시작할 <br>
<br>
무렵이었다. 봉팔은 헛간에 넣어두었던 녹슨 덫들을 손질하려고 잠깐 울타리에 걸어놓았다.<br>
<br>
그런데 일본인 순사가 봉팔의 집 앞을 지나다가 그것을 발견하고 시비를 걸어 왔다. 그 덫들은 <br>
<br>
허가 받지 않은 것이었다.<br>
<br>
“이것은 불법이오, 불법! 하룻강아지 범이노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간덩이가 부었군!”<br>
<br>
“손질하려고 걸어둔 것일 뿐인데 웬 시비야! 엉?”<br>
<br>
“뭐이요? 이것이 어디다 반말이야 반말이!!” 그간 여러 가지로 심기가 불편했던 봉팔이는 다<br>
<br>
짜고짜 일본인 순사를 번쩍 들어다 메다 꽂았다. 기습을 당한 일본인 순사는 경찰용 사베르(긴 <br>
<br>
칼)를 빼들고 일어났다.<br>
<br>
하지만 봉팔이 먼저 주먹만한 돌을 주워 들고 그의 코뼈를 부러뜨렸다. 일본인 순사는 피를 낭<br>
<br>
자하게 쏟으며 그 자리에서 뻗어버렸다. 순간, 봉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사가 죽었을지도 <br>
<br>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팔은 웅이면 서쪽 산속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곳은 해발 2천m급의 <br>
<br>
산들이 즐비한 첩첩산중이었다.<br>
<br>
봉팔은 그곳에서 5년간이나 틀어박혀 산생활을 했다. 반은 산짐승, 반은 산적이나 다름 없었다. <br>
<br>
그간 경찰이 몇 번씩 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를 잡는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br>
<br>
“개새끼들,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라. 포수면 짐승이나 잡을 것이지 사람을 이렇게 작살내? 두<br>
<br>
고봐라. 내가 열 배, 스무 배로 복수할 테니.”산에 들어간 이후 풍산 포수들에 대한 봉팔의 증<br>
<br>
오심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산속에서 포수들을 만나면 무조건 시비를 걸어 두들겨 팼다.<br>
<br>
안수천 일대의 산에는 짐승들이 많아 포수들이 자주 드나 들었다. 봉팔은 그 꼴이 보기 싫어 그 <br>
<br>
일대에선 다른 포수들의 출입을 금지해버렸다. 한번은 멋도 모르고 포수 두 명이 그곳에 왔다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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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사건이 일어났다.<br>
<br>
“아구, 아구!<br>
<br>
제발 좀 살려주시오!”<br>
<br>
“감히 어디다 발을 들여놔! 여기는 내 땅이야! 한 번만 더 이곳에 얼씬대면 피죽을 만들테다!<br>
<b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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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포수들은 아예 그 지역에 발길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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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이 아니던가. 개마고원의 포수들은 병인양요, 신미양요때 함경과 평안 양도의 포수들과 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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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호국의 일선에서 싸우기도 했는데 그만큼 직업에 대한 긍지가 컸다. 이들은 남쪽의 포수들과<br>
<br>
는 달리 복수로 팀을 이루어 호랑이나 곰 같은 맹수 사냥을 주로 했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강<br>
<br>
을 건너 만주와 러시아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br>
<br>
이처럼 생사고락을 같이 하다보니 그들만의 독특한 동지애가 형성되게 되었고 희생된 동지의 가<br>
<br>
족을 끝까지 돌보는 전통 또한 생겨났던 것이다. 손경위가 박 포수에게 말했다. “심정이 괴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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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 줄은 압니다만, 저는 지금 공무를 집행하는 중입니다. 봉팔이가 계속해서 훼방을 놓는다면 <br>
<br>
어쩔 수없이 체포하여 풍산 경찰서에 넘길 수밖에 없겠는데요.”<br>
<br>
박포수는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손경위가 말을 이었다.<br>
<br>
“저렇게 산에 오래 놔두는 것은 봉팔이나 주민한테나 이로울 게 없습니다. 차라리 빨리 형을 <br>
<br>
마치고 나오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것이 친구 분과의 의리를 지키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br>
<br>
다른 대안이 없잖습니까?”<br>
<br>
박포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br>
<br>
“제가 보기에 설득하거나 권유하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체포하는 수밖에는요. 박포수님은 잠<br>
<br>
시 뒤로 물러나 제가 하는 것을 지켜만 보십시오.”<br>
<br>
박포수는 한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경위의 말에 동의<br>
<br>
한다는 뜻이었다.<br>
<br>
다음날, 일행은 다시 백산과 동적산으로 출발했다. 손경위는 줄곧 봉팔이를 체포하는 방법에 골<br>
<br>
몰하고 있었다. 일행은 먼저 명승지로 알려져 있는<br>
<br>
백산부터 수색하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아 봉팔이가 설치해 놓은 것으로 짐작되는 벼락틀이 <br>
<br>
또 발견 되었다. 어제 본 것과는 달리 설치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듯했다. 틀 안에는 방금 걸려<br>
<br>
든 듯한 들꿩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br>
<br>
들꿩은 북한의 고산지대에만 서식한다. 개마고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길이는 한자 정도에 <br>
<br>
다갈색과 흰색이 잘 어우러져 있다. 미국에서 사냥감으로 인기있는 뇌조의 한국형이라고 생각하<br>
<br>
면 비슷할 것이다. 백두산 근처에만 서식하는 희귀조인 멧닭은 그 사촌쯤 된다.<br>
<br>
그 들꿩은 머리가 부서져 있었고 가슴팍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소년시절 매 사냥을 많이 해보<br>
<br>
았던 손경위는 금세 매로 인한 상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역시 봉팔이였다. 그는 어제 한여름<br>
<br>
인데도 털갈이조차 끝나지 않은 매를 들고 나왔지 않은가.<br>
<br>
"벼락틀은 더 있을 겁니다. 들꿩이나 한 두 마리 잡자고 매를 데리고 나왔을 리는 없을 테니까<br>
<br>
요.”<br>
<br>
손경위가 박포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박포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br>
<br>
"봉팔이도 표범 흔적을 잡은 것이 틀림없는 <br>
<br>
“형님, 그런 높은 곳에 호랑이나 표범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오. 하지만 15년간 그<br>
<br>
곳을 오르내려 보니 놈들의 발자국을 본 것만 해도 세 번입니다.”<br>
<br>
강포수는 제법 진지해져서 말했다. 박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br>
<br>
“그래. 내일 나랑 같이 올라가서 자세한 이야기 좀 해줄 수 있겠나?”<br>
<br>
조금은 명령조의 말이었다. 강포수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br>
<br>
“여기까지 불러놓고는 새삼스럽게! 좋소, 형님. 누구 말씀이라고 거역하겠소?”새벽 다섯 시. <br>
<br>
먼길을 가야 했으므로 일행은 일찌감치 출발을 했다. 총각은 봉팔이 남겨놓은 짐승을 처리하기 <br>
<br>
위해 숙소에 남았다.<br>
<br>
약수천을 넘어 동곡산 기슭을 거쳐 오르막 산길을 오를 때쯤이 되자 해가 둥실 떠서 이마 위에 <br>
<br>
따갑게 비쳐들었다. 드디어 눈앞에 정상이 보였다. 멀리 서쪽으로 개마고원이 끝나 가는 지점에 <br>
<br>
오래 전에 만들어진 장진호가 푸른 수면을 반짝이며 아스라이 떠 있었다(10년 후 미해병 1사단<br>
<br>
이 혈전을 되풀이하면서 10만 병력의 중공군 제9병단이 겹겹이 만들어놓은 포위망을 뚫고 흥남<br>
<br>
으로 탈출한 대격전장이 바로 그곳이다).<br>
<br>
갑자기 하얀 안개 같은 것이 밀려들더니 불과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남식이 깜짝 놀라<br>
<br>
자 강포수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br>
<br>
"안개가 아니라 구름이오, 구름!” 일행은 이미 구름을 딛고 있을 만큼 꽤 높이 올라온 것이다.<br>
<br>
구름은 곧 스쳐 지나갔다. 작은 산등성이를 넘자 수㎞의 바위절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곡산의 <br>
<br>
정상은 마치 칼로 잘라놓은 것같이 넓고 평평했다. 바위절벽은 넓은 정상과 평행해서 달리는 형<br>
<br>
상을 하고 있었다.<br>
<br>
일부는 잡목으로 가려진 가파른 급사면이고 일부는 통나무로 된 수직 절벽이었다. 바로 그곳에 <br>
<br>
제2의 주름바위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바위와 고산지<br>
<br>
대의 키 작은 관목이 층층이 뒤섞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강포수는 어디에 산양이 많고 어디에서 <br>
<br>
호랑이 발자국을 보았었는지를 설명했다.<br>
<br>
“그런데 형님.한 가지 명심하실 일이 있소. 표범을 찾아내겠다고 저 절벽에 붙어서 마구 쑤시<br>
<br>
고 다니면 놈은 오늘밤 당장 이 동네를 떠날 거요.”<br>
<br>
"표범이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강포수의 말에 박포수가 의견<br>
<br>
을 내놓았다.<br>
<br>
“일단 산 면 아랫부분이나 한 번 찾아봅시다. 표범이 먹이를 잡으러 다니려면 꼭 저곳을 통과<br>
<br>
했을 겁니다. 어쩌면 발자국을 남겼을지도 모르지요.”일행은 바위 사면 아래의 언저리를 따라 <br>
<br>
가로질러 가며 땅바닥을 살폈다. 하지만 별다른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일행이 관목이 빽빽<br>
<br>
이 우거진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였다. 화살이 위쪽으로 뛰어올라가자 갑자기 10여 마리의 <br>
<br>
들꿩들이 사방에서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가 다시 무리를 지어 동적산 정상 밑으로 사라져버<br>
<br>
렸다.<br>
<br>
“이런 곳에 꿩이 있다니!” 원래 들꿩이 고산에 서식하는 새인 줄 모르고 있던 손경위의 감탄<br>
<br>
에 강포수가 놀리듯 한마디 거들었다.<br>
<br>
“독수리도 많지요!” 화살은 매우 긴장한 모습으로 바위틈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경위가 뛰어<br>
<br>
올라 가보니 바위 틈 사이에 동물의 배설물이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비에 씻기<br>
<br>
고 바람에 날려 절반밖에 남지 않은 오래된 것이었다.<br>
<br>
화살이 배설물에 코를 들이대는데 뭔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손경위가 나뭇가지로 배설<br>
<br>
물을 부숴보았다. 놀랍게도 백금 목걸이가 나왔다. 그것도 연인의 사진을 넣어 걸고 다니는 로<br>
<br>
켓(locket)이었다. 목걸이는 아직도 제 색깔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br>
<br>
손경위는 배설물을 다시 살펴보았다. 배설물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흰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br>
<br>
분명한 뼛조각이었다. 손경위의 등줄기로 오싹한 전율이 스<br>
<br>
쳐지나 갔다. “표범이다!”<br>
<br>
손경위의 외침에 일행이 몰려왔다. 손경위는 로켓을 내보이며 말했다.<br>
<br>
“틀림없는 식인 표범입니다. 이 로켓의 주인은 당영이겠지요.” 일행이 환호성을 질렀다.드디<br>
<br>
어 제대로 목표를 잡은 것 같았다. 손경위는 칼을 꺼내 단단히 들러붙은 로켓을 열었다. 건장한 <br>
<br>
남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분명 당영일 것이었다. 그 속에는 꼬깃꼬깃 접힌 작은 쪽지도 들어 <br>
<br>
있었다. 단정한 여자 글씨였다. 숫자와 글자만 있는 것으로 볼 때 만주의 주요도시에 있는 유명 <br>
<br>
은행의 계좌번호와 예금주들의 이름인 듯했다. “쌍매군요.”<br>
<br>
손경위는 로켓을 안주머니에 잘 보관했다. 분명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br>
<br>
일행은 계속해서 주름절벽 아래의 언저리를 따라서 표범의 자취를 추적해 나갔다. 그리고 몇 시<br>
<br>
간 후 또 다른 성과를 얻게 되었다. 맨 끝쪽, 최북단의 메마른 땅 위에서 표범 발자국이 발견된 <br>
<br>
것이다.<br>
<br>
그곳은 비교적 지면이 단단해서 발자국은 희미했다. 박포수나 강포수 같은 전문가가 아니었다면 <br>
<br>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이었다.<br>
<br>
“2,3일 정도 된 것 같소, 형님.”<br>
<br>
강포수의 말에 박포수도 고개를 끄덕였다.<br>
<br>
“약수천 유역뿐 만 아니라 북쪽의 서창리 쪽까지도 나다녔다는 얘기야.”<br>
<br>
일행은 이 바위 절벽이 표범의 서식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표범이 로켓을 배설한 시점, 즉 당영<br>
<br>
이 살해된 뒤부터는 물론 2∼3일 전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 곳에 서식했다는 것은 더 이상 의심<br>
<br>
할 여지가 없었다.<br>
<br>
일행은 숙소로 돌아와 과연 절벽 속으로 숨어 들어간 표범의 은신처를 어떻게 급습할 것인가를 <br>
<br>
의논했다. 방대한 지역이라 발자국을 더 발견하기도 어려울테고 또 발견한다 해도 절벽 지역을 <br>
<br>
들쑤시고 다닐 수는 없었다.<br>
<br>
지금까지 박포수의 판단에 묵묵히 따르던 손경위가 입을 열었다.<br>
<br>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개를 대여섯 마리 구해다가 표범이 들고 나가는 바위절벽 길목에 묶어<br>
<br>
두는 겁니다. 그리고 표범이 개를 습격하면 바로 다음날 새벽 화살을 앞세워 발자국을 추격합시<br>
<br>
다. 일단 표범이 발자국을 남기도록 유인하자는 말입니다.”<br>
<br>
사실 지금까지는 표범 발자국을 몇 개 발견하기는 했지만 워낙 오래된 것들이라 화살이 능력을 <br>
<br>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아무리 우수한 수렵견이라도 발자국이 생긴 지 한나절만 지나면 추적하<br>
<br>
기가 힘들고 하루가 지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발자국은 서너 시간을 지나지 않은 것이<br>
<br>
라야 추적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br>
<br>
손경위의 의견은 기발했다. 확실히 젊고 날카로운 머리에서 짜낸 아이디어다웠다. 하지만 박포<br>
<br>
수와 강포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오랜 사냥 경력을 갖고 있지만 한번도 이런 방법을 <br>
<br>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알을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강포수가 먼저 찬성했다.<br>
<br>
“까짓 것, 한번 해 봅시다. 별다르게 뾰죽한 수도 없으니까!”<br>
<br>
박포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한다는 뜻이었다.<br>
<br>
“감사합니다. 출장비도 많이 남았으니 내일 판판의 트럭을 빌려서 나흥리와 양평리를 돌면서 <br>
<br>
개를 사모읍시다 .다섯 마리면 충분하겠지요!”<br>
<br>
손경위의 말에 이남식이 끼어들었다.<br>
<br>
“굳이 돈들여서 트럭 빌리고 개를 살 필요가 있나요?”<br>
<br>
그 전날 이남식은 봉팔을 지키느라 화전민 마을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랫 집에 사는 더벅머<br>
<br>
리 총각이 비실거리며 나타나 하소연을 했다. 동네에서 2㎞쯤 떨어진 곳에 500평쯤 되는 화전을 <br>
<br>
일구고 고구마를 심었는데 멧돼지 10여 마리가 나타나 쑥밭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었다.<br>
<br>
“그 멧돼지떼를 몽땅<br>
<br>
잡아다 미끼로 쓰는 겁니다. 개를 다섯 마리나 사는 것도 문제지만 매일 먹이와 물을 실어 나<br>
<br>
르는 게 보통 일인가요?”<br>
<br>
약간의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일행은 이남식의 의견을 채택하기로 했다. 멧돼지는 그날 밤에도 <br>
<br>
올 가능성이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는 뜻이었다. 일행은 우선 아랫집의 더벅머리를 불러왔다. <br>
<br>
“그젯밤도 어젯밤도 왔으니 오늘밤도 올 거라요. 아직 박살나지 않은 고구마 밭이 7할이 넘거<br>
<br>
든요.”일행은 더벅머리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포획단을 짰다. 대장은 물론 박<br>
<br>
포수였다. 박포수는 총각과 더벅머리, 그리고 마을사람에게 멧돼지 고기를 주기로 하고 지원군<br>
<br>
을 삼았다.<br>
<br>
박포수는 마지막으로 강포수에게 말했다.<br>
<br>
“너도 오늘 좀 도와줘라. 잘되면 멧돼지 뒷다리 하나 주마.”사실 강포수는 집안일 때문에 다<br>
<br>
음날이면 돌아갈 예정이었다.<br>
<br>
“좋소. 그까짓 멧돼지 쯤이야, 뭐. 그런데 형님, 총이 있어야 말이지.”<br>
<br>
그때 이남식이 선뜻 38식 소총을 강포수에게 양보했다.<br>
<br>
“이런 때는 전문가가 나서야지요. 저는 지원군 노릇이나 할랍니다.”<br>
<br>
박포수는 총각과 더벅머리에게 횃불을 네 개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금세 싸릿가지로 횃불<br>
<br>
을 만들어왔다. 박포수는 나머지 지원군들에게도 지시를 내렸다.<br>
<br>
“자, 이제 각자 석유 깡통이나 양동이같이 요란한 소리를 낼 수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준비해<br>
<br>
오세요. 서둘러야 합니다.”드디어 출발 전. 박포수는 브라우닝 5연발 총, 손경위는 모제르 총, <br>
<br>
강포수는 이남식의 38식 소총을 각각 휴대했다. 손경위는 여기에 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일제 군<br>
<br>
용 플래시를 준비했다. 준비를 끝내고 출발하는 데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박포수는 흰 셔<br>
<br>
츠 한벌을 꺼내어 허리춤에 찼다. 이어 모두에게 작전을 설명했다.<br>
<br>
“멧돼지떼를 모아서 한 곳으로 도주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 이제 출발합시다.”<br>
<br>
일행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도 초저녁이었다. 멧돼지가 나타나려면 좀더 기다려야 했다.<br>
<br>
박포수는 멧돼지가 출입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밭 입구를 중심으로 지원군 네 명을 부채꼴로 배<br>
<br>
치했다. 그리고 입구의 정반대 되는 고구마 밭 중앙에는 손경위와 강포수를 잠복시켰다. 박포수 <br>
<br>
자신은, 멧돼지가 도주할 때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입구의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다.<br>
<br>
박포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셔츠를 건너편에 있는 Y자 모양의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 그 모<br>
<br>
양은 마치 허수아비 같았다. 나뭇가지에 노끈을 연결해 당기면 어둠 속에서도 흰 셔츠가 훤히 <br>
<br>
보일 수 있도록 해두었다.<br>
<br>
박포수는 어둠 속에 앉아 총 앞쪽에 나무기둥 두 개를 힘들여 박았다. 한시간이 지났다. 풀벌레 <br>
<br>
소리와 소쩍새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개똥벌레들은 반짝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br>
<br>
갑자기 산 위에서 부석대는 소리가 들려왔다.<br>
<br>
손경위는 침을 삼키며 총목을 잡았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크고 작은 멧돼지들이 박포수 앞을 <br>
<br>
지나 고구마 밭에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집채만한 놈이 나타났다. 흐릿한 달빛 아래에도 그 모<br>
<br>
습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br>
<br>
멧돼지들은 고구마 밭에 들어설 때만 해도 경계하는 태도가 역력했으나 곧 여기저기 퍼져서 고<br>
<br>
구마 밭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푸드득푸드득 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br>
<br>
'그래. 어서, 어서 이쪽으로 와라!’<br>
<br>
고구마 밭고랑에 바짝 엎드려 있던 손경위는 큰 멧돼지가 좀더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공격개시 <br>
<br>
신호는 손경위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br>
<br>
드디어 큰 멧돼지가 고구마 줄기를 넘어 5m 앞까지 접근해 왔다. 가뜩이나 산능선 같은 <br>
<br>
등허리가 더욱 커다랗게 보였다. 손경위는 총을 받쳐든 왼손에 쥐고 있던 플래시를 켰다.<br>
<br>
"따당! 따당! 따당!” 플래시 불빛을 신호로 좌우에서 요란하게 양철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br>
<br>
퍼졌다. 동시에 미리 석유를 뿌려놓은 횃불 네 개에서 환한 불길이 타올랐다. 플래시 불빛을 받<br>
<br>
은 멧돼지떼들은 벌써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손경위는 큰 멧돼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br>
<br>
“탕!”<br>
<br>
모제르총에서 발사된 8㎜ 연두탄에 맞은 멧돼지는 큰 건물이 무너지듯이 고구마 줄기 사이로 쓰<br>
<br>
러졌다. 연두탄은 총탄 끝에 납이 노출되어 있어 명중하면 앞부분이 버섯처럼 크게 확대되어 직<br>
<br>
경이 두 배로 커진다. 그것에 한 번 맞으면 치명상을 입게된다. 어지간한 맹수도 급소에 연두탄<br>
<br>
을 맞으면 즉사하게 되어 있다.<br>
<br>
멧돼지가 죽은 것을 확인한 손경위는 곧 옆에서 사격 중인 강포수를 위해 도주하는 멧돼지 떼에<br>
<br>
게 플래시를 비췄다. 손경위와 비슷한 시기에 첫 탄을 발사했던 강포수는 플래시 불빛에 힘입어 <br>
<br>
마치 자동소총 쏘듯이 세 발을 연속해서 쏘았다. 입심 만큼이나 총 다루는 솜씨도 능숙했다.<br>
<br>
멀리 멧돼지 두 마리가 쓰러졌다가 다시 비틀거리며 뛰는 것이 보였다. 박포수 쪽이었다. 아니<br>
<br>
나 다를까 박포수 쪽에서 두 번의 총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발의 연발총성이 밤<br>
<br>
공기를 뒤흔들었다. 총에 맞고 도망친 멧돼지도 몇 마리 있었지만 이런 어둠 속에서 부상당한 <br>
<br>
멧돼지를 추적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다. 손경위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박<br>
<br>
포수를 불렀다. 잠시 후 흰 셔츠를 손에 든 박포수가 나타났다.<br>
<br>
“일단은 내일 다시 추적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철수합시다. 고생들 많았습니다.”<br>
<br>
돌아오는 길에 손경위가 박포수에게 물었다.<br>
<br>
“그 셔츠는 뭡니까?” 박포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야간에는 조준사격이 불가능합니다. 치명<br>
<br>
상이<br>
<br>
아닌 부상만 입히기가 일쑤지요.”<br>
<br>
“암, 형님 말이 옳아요. 그것도 모르고 그 아편 대장놈이 권총으로 표범을 쐈다가 황천행을 <br>
<br>
한 게야!”아까부터 자신이 쏜 총에 맞고 도주한 멧돼지 때문에 투덜거리던 강포수가 끼여 들었<br>
<br>
다. 박포수가 말을 이었다.<br>
<br>
“그래서 흰 셔츠를 걸어놓는 겁니다. 멧돼지가 전속력으로 셔츠 앞을 뛰어 가면 셔츠가 보이지 <br>
<br>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때 셔츠의 1m 앞 지점을 쏘면 대개는 심장이나 폐에 맞게 되어 있지<br>
<br>
요.”<br>
<br>
박포수가 계속해서 말했다.<br>
<br>
“그리고 또 하나, 총신이 1m 전방 지점으로 향할 수 있도록 말뚝을 두 개 박은 다음 거기에 총<br>
<br>
을 대고 쏘는 겁니다. 밤에 멧돼지나 사슴을 사냥하다가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이지요.”<br>
<br>
박포수는 덧붙여 문제점도 지적했다.<br>
<br>
"하지만 실탄총으로는 불가능하고 산탄총이라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되도록 야간에는 <br>
<br>
사격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요.” 다음날 아침, 일행은 부상당한 멧돼지들을 추적하러 나섰다. <br>
<br>
고구마 밭에 가보니 두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박포수가 지키고 있던 목에도 한 마리가 있었다. <br>
<br>
그 중에는 1년도 안된 어린놈도 끼여 있었다. 손경위는 개구리 참외 같은 무늬가 아직 선명한 <br>
<br>
어린 멧돼지를 보자 미안하고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br>
<br>
사실 손경위는 이런 집단학살 같은 사냥이 좋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전날 밤에도 집채만<br>
<br>
한 놈 하나만 쏘았을 뿐 나머지는 강포수에게 사격의 기회를 넘겼던 것이다.<br>
<br>
‘식인표범을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br>
<br>
손경위는 자신을 타이르며 죄의식을 달래려 했지만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일행은 멧돼<br>
<br>
지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피 흔적으로 보아도 도주한 멧돼지들은 모두 세 마리인 것이 분<br>
<br>
명했다. 일행은 오전 내내 수색한 <br>
<br>
끝에 총에 맞고 도주하다가 죽은 두 마리를 발견 해냈다. 하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발걸음에 변<br>
<br>
화를 보이지 않고 계속 도주한 흔적이어서 추격을 포기하기로 했다.<br>
<br>
오후가 되자 멧돼지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남녀 할 것 없이 온 마을 사람들이 고구마 밭으로 <br>
<br>
몰려들었다. 그들은 멧돼지들을 해체하여 마을로 가지고 내려왔다. 손경위는 두 마리 반만 남기<br>
<br>
고 나머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분배해 주었다. 어쨌든 큰 인심을 쓴 셈이었다. 사실, 다섯 <br>
<br>
장소에 반 마리씩 미끼를 놓아둘 계획이었으므로 더 이상은 필요가 없었다. 그 정도면 표범이 <br>
<br>
배불리 먹고 식곤증이 나서 곧바로 은신처로 직행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강포수는 약속대로 <br>
<br>
멧돼지 다리 하나를 자루에 넣어 등에 걸머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소임도 끝났고 다음날이 <br>
<br>
바로 부친의 제삿날이었기 때문이었다.<br>
<br>
"형님, 저 갑니다! 표범 잡고 만주로 돌아갈 때 우리 집에 들러 하룻밤 안자고 가면 발병 날 테<br>
<br>
니 알아서 하슈!”<br>
<br>
그날 오후, 이남식은 취사도구와 이불 등을 짊어진 총각과 함께 길을 나섰다. 동곡산 바로 아래<br>
<br>
의 약수천가에 야영할 초막을 짓기 위해서였다. 표범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일은 빠를수록 좋았<br>
<br>
다.그래야 생생한 발자국 냄새를 잡을 확률이 커지기 때문이다. 일행이 동곡산 아래에서 곧바로 <br>
<br>
출발하면 현장 도착시간을 적어도 두 시간은 절약할 수 있었다.<br>
<br>
이남식과 총각은 저녁이 다되어서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왔다. 밤이 깊어 모두가 잠자리에 들 무<br>
<br>
렵이었다. 아랫집의 더벅머리가 숙소로 찾아와 총각과 한참을 쑤군대더니 손 경위를 찾았다. 더<br>
<br>
벅머리는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똑똑한 총각에 비하면 더벅머리는 무척 부끄러움을 타는 순<br>
<br>
박한소년이었다.<br>
<br>
“저희 집에 늙은 풍산개가 있거든요.”<br>
<br>
“얼마나 늙었는데?”<br>
<br>
“제가 일곱 살 때부터 길러왔으니까, 지금 열세 살이지<br>
<br>
요.”<br>
<br>
손경위는 깜짝 놀랐다. 원래 수렵견은 가정견과는 달리 천수를 다하지 못한다. 아무리 뛰어난 <br>
<br>
놈이라 해도 결국 맹수의 일격에 희생되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사냥꾼들에게 있어 수<br>
<br>
렵견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게다가 아무리 가정견이라고는 하지만 수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br>
<br>
로서는 열세 살이란 믿기지 않는 나이였던 것이다.<br>
<br>
“저희 개는 노루만 100마리 넘게 잡았고 멧돼지도 세 마리나 잡았습니다요. 너구리, 오소리는 <br>
<br>
수도 없이 잡았구요. 그리고….”<br>
<br>
더벅머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br>
<br>
“혼자 잡은 것은 아니지만 표범도 한 마리 잡았어요.”<br>
<br>
옆에서 듣고 있던 박포수의 귀가 번쩍 트였다. “뭐? 표범을 잡아? 개가 표범을 잡았다구?”<br>
<br>
“네,사실입니다요. 서창리에 사는 개사냥꾼이 저희 개를 빌려갔는데 그 집 개 두 마리하고 함<br>
<br>
께 표범을 잡았어요.그 집 개들은 죽었지만 저희 집 개는 상처하나 안 입었는걸요.”<br>
<br>
박포수가 탄복하며 말했다.<br>
<br>
“과연, 풍산개가 범 잡는 개라고 소문날 만하군!”<br>
<br>
박포수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풍산개가 범 잡는 개로 알려져 <br>
<br>
있다. 풍산군민들 가운데는 포수총에 맞고도 저항하는 호랑이의 목<br>
<br>
결국 손경위는 더벅머리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br>
<br>
“가서 개를 데려와봐라.”<br>
<br>
더벅머리는 단숨에 달려 내려가 개를 데리고 왔다. 라이카견인 화살처럼 귀가 선 풍산개였다. <br>
<br>
손경위가 풍산군에 들어와서 본 풍산개들은 태반이 바둑이처럼 귀가 꺾인 놈들이었는데 이제야 <br>
<br>
진짜를 만나게 된 것이다. 등잔불을 비춰보니 몸이 수척한 것이 수명이 다하여 노쇠해진 티가 <br>
<br>
역력했다. 눈마저 반쯤 감겨 있어 생사를 초월하여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듯이 보였다. 화살<br>
<br>
이 으르렁거리며 시비를 걸어와도 이미 세속 일은 잊었다는 듯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br>
<br>
손경위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망설여졌지만 결국 마음을 굳혔다.<br>
<br>
“좋다! 내일 이 녀석을 데리고 가자. 내가 멧돼지 반 짝을 줄 테니 아버지께 갖다 드리고 오너<br>
<br>
라.”<br>
<br>
다음날. 이남식과 동네 사람 셋에게 멧돼지 고기를 지게에 지우고 동곡산으로 출발했다. 더벅머<br>
<br>
리의 풍산개는 약수천을 건너면서부터 제대로 걷지 못했다. 더벅머리는 풍산개를 자기 지게에 <br>
<br>
얹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바위 절벽에 도착한 일행은 계속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며 북쪽 <br>
<br>
끝에 당도했다. 멧돼지 고기를 미끼로 설치할 장소였다.<br>
<br>
약수천 일대에는 짐승이 많지만 봉팔이 들쑤셔놓아 당분간 표범이 북쪽으로만 출입할 것 같았<br>
<br>
다. 최근의 발자국도 그 근처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br>
<br>
일행은 멧돼지 고기로 미끼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 일에도 요령이 있었다. 표범은 밤에도 은<br>
<br>
폐물을 이용하여 목표물에 접근한다. 그래서 사방이 훤히 트인 곳은 될수록 피하고 표범이 느긋<br>
<br>
하게 포식할 수 있도록 사방이 가려진 곳이 좋다. 하지만 표범에게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물<br>
<br>
특유의 후각은 그<br>
<br>
그 자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 자는 잠시 총을 짚으며 주춤했다. 다음 바위로 건너뛰기에는 <br>
<br>
거리가 너무 멀어 보였다. 손 경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준 십자선을 그자의 왼쪽 어깨 위에 <br>
<br>
고정시켰다. 망원 조준경의 십자선과 목표는 액션 영화에서 흔히 보듯 일치하지 않는다. 총탄은 <br>
<br>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기 때문이다.<br>
<br>
그래서 저격을 할 때는 200m 전후의 거리에 탄착점과 십자선이 일치하도록 한 뒤 거리에 따라 <br>
<br>
낙차를 감안하여 올려 쏘거나 내려 쏘는 것이다.<br>
<br>
손 경위가 노린 것은 그자의 어깨가 아닌 심장이었다. 손 경위는 방아쇠에 힘을 주었다.<br>
<br>
“탕!”<br>
<br>
그 순간 그자는 짚고 있던 기관총과 함께 거세게 흐르는 약수천으로 떨어졌다. 순간 약수천 물 <br>
<br>
위로 물보라가 일어났다.<br>
<br>
그자는 뻣뻣이 굳은 채 거센 물결 속에 휩쓸려 빠르게 하류로 흘러가 버렸다. 이제서야 세 명의 <br>
<br>
암살객들을 제압하게 된 것이다.<br>
<br>
일행은 다시 산중턱의 은신처에서 약수천가의 초막으로 내려왔다. 기관총 때문에 혼이 난 이남<br>
<br>
식은 왼쪽 턱이 퉁퉁 부어 있는 중년신사를 호되게 심문하기 시작했다.<br>
<br>
그는 약수천 속에 두어 번 처박혀 배가 장구처럼 부풀어오를 만큼 물을 들이켜고 나자 허약한 <br>
<br>
인텔리답게 모든 것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 꼴은 마치 임꺽정의 참모로 있다가 그를 철저히 <br>
<br>
배신했던 서림과 다를 바 없었다.<br>
<br>
제, 제 본명은 이종석입니다. 조선인인 것도 맞, 맞구요.”<br>
<br>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소학교를 마쳤다고 했다. 그래서 능숙하게 일본어를 구사할 <br>
<br>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자관계 등 여러 가지 불미스런 일로 인해 교사직을 그만두고 오랫동<br>
<br>
안 실업자로 지내다가 당영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참모로 일하게 된 것이다.<br>
<br>
“쌍매가 체포된<br>
<br>
것은 이틀 후에야 알았습니다. 그 길로 명월구로 달려가 조직원들과 함께 쌍매와 연락할 방법<br>
<br>
을 찾았지요. 그런데….”<br>
<br>
이종석은 운이 좋았다. 조직원의 친구 아들이 경찰서의 사환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집 한 채 값<br>
<br>
을 제시하며 소년을 구워삶았다. 소년은 손쉽게 이쪽 편이 되어 이종석과 쌍매 사이를 오가며 <br>
<br>
편지를 전하는 전령사 역할을 해냈다.<br>
<br>
쌍매는 이종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br>
<br>
내가 시간을 끌테니 개마고원의 밭만 빼고 평안북도와 만주에 있는 나머지 네 곳의 수확을 빨리 <br>
<br>
마무리하시오.’<br>
<br>
쌍매가 말한 네 곳의 아편밭은 경찰도 파악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였다.<br>
<br>
“뭐야? 시간을 끌겠다고? 아니, 그러면 그 계집이 우리를 농락한 거 아냐?”<br>
<br>
이제 손경위는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표범을 쫓아다니면서도 <br>
<br>
“남편을 죽인 표범을 잡아와야 모든 것을 자백하겠다”던 쌍매의 말이 늘 억지처럼 느껴졌었<br>
<br>
다.<br>
<br>
가증스럽게 눈물을 흘리며 표범을 잡아달라던 쌍매의 농간에 놀아나다니 어처구니 없었다. 평소 <br>
<br>
점잖던 손경위였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br>
<br>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박포수가 나섰다.<br>
<br>
“어쨌든 얘기는 더 들어봅시다. 그래, 당신은 여기에 왜 왔소?”이종석은 그 사연에 대해서도 <br>
<br>
숨김없이 말했다. <br>
<br>
“사실은 토벌대가 실수한 것이 하나있습니다.”<br>
<br>
“그게 무엇이오?”<br>
<br>
명월구 토벌대가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양귀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의 일이었다. 아편에 대<br>
<br>
해 무지했던 그들은 그저 양귀비의 뿌리를 뽑아 발로 짓 밟으면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br>
<br>
하지만 아편은 양귀비꽃 밑동의 방울같이 생긴 부분에서 나오는 진<br>
<br>
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벌대가 물러가자 책임자격인 안서방은 동료 둘을 불러다 양귀<br>
<br>
비 꽃망울을 모아다 아편을 짰다. 예상치의 3할도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생아편 몇덩어리는 건<br>
<br>
질 수가 있었다. 그들은 당영 조직에게 물건이 나왔다는 전갈을 보냈고 이종석이 물건을 인수하<br>
<br>
러 개마고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br>
<br>
그러다가 그는 떠버리 강 포수를 만나 종이쪽지가 들어 있는 로켓 얘기를 듣고 그날로 혜산진으<br>
<br>
로 가서 지급전화를 걸어 명월구의 조직책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로부터 세 시간도 안 돼 쌍<br>
<br>
매로부터 지시가 떨어졌다.<br>
<br>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당장 쪽지를 회수하시오.’<br>
<br>
항상 쫓겨다니던 쌍매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만주 각처의 은행에 가명으로 비밀 예금을 들<br>
<br>
어두었다. 그 쪽지에는 바로 그 비밀자금의 구좌번호가 씌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액수는 <br>
<br>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났다.<br>
<br>
사실 쌍매는 이종석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 로켓의 행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쌍매는 <br>
<br>
항상 로켓을 목에 걸고 다녔는데 하필 당영이 죽기 전날 시냇물에서 목욕을 하기 위해 잠시 남<br>
<br>
편의 목에 걸어놓았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것은 아편의 연기에 늘 찌들려 있어 기억력이 <br>
<br>
흐릿해진 탓일 수도 있었다.<br>
<br>
이종석은 쌍매의 명령이 어떠한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처치해야 할 세 사람이 <br>
<br>
명사수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을 화력으로 제압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br>
<br>
다.<br>
<br>
그는 급히 압록강을 건너 장백현에 사는 양(梁)이라는 중국인 청년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그자<br>
<br>
는 동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 항일연군 제1로군에서 기관총 사수로 있다가 총을 가지고 탈주한 <br>
<br>
전직 빨치산이었다.<br>
<br>
다음날 이종석은 자신의 호위병과 양가를 데리고 세 명 포수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손경위 일<br>
<br>
행과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br>
<br>
제 모든 것은 명백해졌다. 손경위는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br>
<br>
“이제 이런 우스꽝스러운 사냥은 계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일 이자를 데리고 당장 명월구로 <br>
<br>
돌아갑시다. 시간도 너무 많이 흘렀고 아직 표범 얼굴도 못 보지 않았습니까?”<br>
<br>
박포수가 한참만에 무겁게 입을 떼었다.<br>
<br>
"속은 게 웃음거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빈손으로 가면 진짜 웃음거리가 됩니다. 게다가 이 식<br>
<br>
인표범은 풍산군민의 화근거리입니다. 웅이면민들도 이 사냥이 성공하기를 학수고대할 걸요?”<br>
<br>
손경위는 그말을 듣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박포수는 말을 이었다.<br>
<br>
“30년간 사냥을 하다보니 묘하게도 육감이라는 것이 발달하더군요. 2∼3일이면 표범이 미끼를 <br>
<br>
덮칠 겁니다. 3일만 참아보고 안되면 돌아갑시다.”<br>
<br>
손경위는 고개를 끄덕였다.<br>
<br>
다음날 새벽 4시. 손경위와 박포수는 화살을 앞세우고 바위절벽으로 향했다. 이남식은 이종석을 <br>
<br>
지키기 위해 남았고 총각이 지게를 지고 따라나섰다. 손경위가 의아한 듯 물었다.<br>
<br>
“지게는 뭐하려고?”<br>
<br>
“어제 죽은 사람도 묻어주고 배낭도 지고 오려구요, 나리.”<br>
<br>
그러고보니 지게 위에는 삽과 괭이가 얹혀 있었다. 박포수가 앞장서 걷다가 웃으며 말했다.<br>
<br>
“그 속에는 옷하고 담요 같은 것밖에 없던데?”<br>
<br>
“그래도 우리네 같은 가난뱅이들한테는 큰 재산입니다요.”<br>
<br>
그날 지게가 큰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br>
<br>
손경위 일행은 지평선에 붉은 해가 얼굴을 내밀 때 쯤 바위절벽 아래에 도착 했다. 총각은 중간<br>
<br>
에서 갈라져 어제의 사건 현장으로 갔다. 첫 번 째 멧돼지 고기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박<br>
<br>
포수가 일행에게 격려<br>
<br>
하듯 한마디했다.<br>
<br>
“좀더 썩어야 걸리겠는데요? 표범은 생고기도 썩여 먹을 만큼 썩은 고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리<br>
<br>
고 썩어야 냄새도 멀리 퍼집니다.”<br>
<br>
하지만 천하의 명포수인 그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표범이 썩은 고기도 먹을 수 <br>
<br>
있다는 것이지 썩은 고기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br>
<br>
일행이 두번째 미끼가 있는 곳으로 접근해 갔을 때였다.<br>
<br>
“야! 있다! 드디어 왔었군요!”<br>
<br>
맨앞에 있던 손경위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미끼에서 50미터쯤 떨어진 부드러운 땅위에 위쪽<br>
<br>
에서 내려온 표범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발자국은 북쪽으로 사라졌다. 표범은 <br>
<br>
코앞에 있는 미끼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표범의 후각은 그다지 신통치 않은 편에 속<br>
<br>
했다. <br>
<br>
산세를 유심히 살피던 박포수가 말했다.<br>
<br>
“이놈이 풍산개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데.”<br>
<br>
이틀 전에 내린 비로 땅이 부드러워진 탓에 표범의 발자국은 희미하게 사면을 따라 이어져 있었<br>
<br>
다.<br>
<br>
손경위는 온몸을 둘러싼 대기가 꽉 짓누르듯 자신을 압박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물 사냥감과 격<br>
<br>
돌하기 전에 종종 나타나곤 했던 육감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br>
<br>
'이제 잡히는구나!’<br>
<br>
손경위는 느슨해 있던 모젤 소총의 멜빵을 오른쪽 팔꿈치로 팽팽히 당겨 급속 사격 준비를 했<br>
<br>
다. 일행은 30분 동안 사면을 오르락내리락하던 끝에 풍산개를 묶어두었던 공터에 다다랐다.<br>
<br>
역시 개는 죽어 있었다. 등을 보이고 쓰러져 있는 하얀털의 풍산개는 마치 피로 범벅된 휴지뭉<br>
<br>
치처럼 보였다. 개의 목주변은 빙돌아가며 피투성이가 되어있었고 복부를 포함한 아랫도리는 알<br>
<br>
아보기 힘들만큼 갈가리 찢긴 상태였다.<br>
<br>
풍산개는 <br>
<br>
노구를 이끌고 죽음의 격투를 벌였던 듯 여기저기에 처절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방에 흩어 <br>
<br>
뿌려진 피는 격렬히 저항하다가 최후를 맞은 풍산개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었다.<br>
<br>
박포수가 풍산개에게 다가가 꽉 다물려 있는 입을 벌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풍산개의 입속에<br>
<br>
는 피묻은 표범 털이 한 움큼이나 들어있었다.<br>
<br>
그 털속에는 표범의 살조각도 일부 붙어 있었다.박포수는 반쯤 감기다 만 풍산개의 눈을 살며시 <br>
<br>
감겨주었다.<br>
<br>
“역시 풍산개군요. 그 몸으로 마지막까지 혈투를 벌이다니. 표범도 분명 상처를 입었을 겁니<br>
<br>
다.”<br>
<br>
손경위는 비록 짐승이지만 풍산개의 주검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여 명복을 빌어주었다.<br>
<br>
“이것 좀 보십시오!”<br>
<br>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던 박포수가 30m쯤 떨어진 바위 위에서 외쳤다. 그곳에는 콩핏방울이 뚝뚝 <br>
<br>
떨어져 있었다. 아침 이슬에 젖어서인지 아직도 붉은빛이 생생해 보였다.<br>
<br>
“화살! 추적해라!”<br>
<br>
박포수의 외침에 화살이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10m도 못가서 하얀 꽃 위에 떨어진 붉은 <br>
<br>
핏방울을 찾아냈다.<br>
<br>
"실핏줄이 상했군요.”<br>
<br>
박포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표범은 용케도 급한 사면을 타고 위쪽으로 올라 간 것이 분명했다.<br>
<br>
표범이 여기저기 떨어뜨리고 간 핏방울이 있어서인지 화살의 추적에도 가속도가 붙었다.<br>
<br>
표범의 발자국은 완만한 오르막길에서 바위절벽 중앙의 바위가 꽉 찬 곳으로 행해 있었다.<br>
<br>
손경위와 박포수는 사방을 경계하면서 바위가 비늘처럼 놓여있는 지대로 들어섰다.<br>
<br>
“이놈이 묘한 곳으로 가는데요?”<br>
<br>
바위 사이를 힘겹게 오르던 박포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br>
<br>
“무슨 말씀이십니까?”<br>
<br>
손경위가 물었다.<br>
<br>
“제가 요전에 말씀드렸던 갑산의 조씨 삼형제 기억하시죠?”창으로 호랑이를 사냥하다가 큰형<br>
<br>
을 무참히 잃었다는 형제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때 박포수는 그 호랑이를 추적해 이 바위절벽<br>
<br>
에서 사살했었다.<br>
<br>
박포수는 화살이 향하고 있는 전방에 솟아있는 큰 바위를 가리켰다.<br>
<br>
“저기가 바로 그 호랑이가 숨어있었던 곳입니다. 표범도 저 굴에 숨어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br>
<br>
면 묘한 우연이군요.”<br>
<br>
아니나 다를까. 화살은 정확히 그 바위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지면에 나 있는 표범발자국을 살<br>
<br>
펴보니 바위 밑으로 사라진 것이 틀림없었다.<br>
<br>
박포수는 탄성을 질렀다.<br>
<br>
“허참! 호랑이나 표범이나 은신처를 고르는 눈은 똑같군요.”<br>
<br>
"굴은 아래에서 위로 뚫려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바위 밑을 들여다봐야 해요. 입구는 <br>
<br>
아주 좁지만 굴 안에 들어가 보면 상당히 넓습니다.”<br>
<br>
박포수가 말했다. 화살은 한발한발 신중히 내디디면서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유명한 호랑이 사<br>
<br>
냥개의 피를 이어받은 라이카견 화살은 보통개들과 달리 호랑이나 표범에 본능적인 공포심이 전<br>
<br>
혀 없었다.<br>
<br>
화살은 바위 10m 전방쯤에서 마치 투명한 벽에라도 부딪힌듯 갑자기 멈춰섰다. 그리고 목덜미의 <br>
<br>
털을 곤두세우며 공격자세를 취했다. 굴속에 표범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br>
<br>
손경위는 자세를 낮추고 바위 밑을 살펴 보았다. 어둡게 보이는 공간이 굴의 입구인 듯했다. 박<br>
<br>
포수가 속삭였다.<br>
<br>
“연기를 피워서 쫓아냅시다! 다행히 저 굴에는 다른 곳으로 통하는 탈출구가 없습니다.”<br>
<br>
30년전 썼던 방법을 다시 사용하자는 얘기였다. 손경위는 고개를 끄덕였다.<br>
<br>
손경위는 박포수의 엄호를 받으며 화살을 끌어내 100m 뒤에 있는 나무에 묶어두었다. 전의에 불<br>
<br>
타있던 화살은 몸부림치며 쉽게 물러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제부터 벌여야 할 표범과의 전투에<br>
<br>
는 화살을 제외시켜야 했다.<br>
<br>
박포수는 10m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브라우닝 엽총으로 굴입구를 겨냥했다. 그동안 손경위<br>
<br>
는 칼로 생나무와 마른 나뭇가지들을 베어냈다. 생나무를 태우면 연기가 많이 나기 때문이었다.<br>
<br>
한시간 후 굴 입구에는 커다란 나뭇단이 쌓였다. 손경위는 라이터를 꺼내 맨 아래쪽의 마른 잔<br>
<br>
가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잎사귀가 많이 달려있는 나뭇가지로 부채질을 하자 불길이 크게 타<br>
<br>
오르기 시작했다.<br>
<br>
손경위는 모제르총을 들고 50m쯤 후퇴하여 자리를 잡았다.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망원조준경에 <br>
<br>
목표가 지나치게 확대되어 급소를 식별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었다.<br>
<br>
'유황가루와 고춧가루가 있었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br>
<br>
손경위는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화살과 함께 오소리사냥을 많이 해<br>
<br>
보았던 그는 굴에서 짐승을 튕겨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오소리중에는 굴바닥의 흙을 파서 코<br>
<br>
를 묻고 그 독한 연기를 참아내는 놈도 있었다. 손경위는 혹시 표범도 그런 재주가 있는 것은 <br>
<br>
아닐지 내심 초조해졌다.<br>
<br>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화살이 목줄을 그대로 매달고서 갑자기 굴입구로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br>
<br>
화살이 어찌나 몸부림을 심하게 쳤던지 묶어두었던 나뭇가지는 이미 부러져버린 것이다. 손경위<br>
<br>
와 박포수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순간 당황했다. 손경위는 격앙된 음성으로 화살을 불렀다.<br>
<br>
“화살! 당장 이리 와!”<br>
<br>
하지만 화살은 손경위의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굴입구를 향해 크게 서너번 짖었다. 오만하<br>
<br>
게도 표범에게 도전장을 내던지는 신호였다.<br>
<br>
그 순간 불타오르던 나뭇더미들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굴에서 누런 광선<br>
<br>
같은 것이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화살을 덮쳤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표범이었다.<br>
<br>
화살은 과연 명견답게 표범의 이빨을 피해 버렸다. 표범 역시 뱀처럼 몸을 트는 비상한 능력을 <br>
<br>
갖고 있었다. 표범은 화살이 몸을 가누기도 전에 벌써 방향 전환을 끝내고 다시 공격을 위한 <br>
<br>
도약을 하려는 찰나였다. 그순간 손경위의 모젤총과 박포수의 브라우닝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br>
<br>
“탕! 탕!”<br>
<br>
표범은 총격에 밀리듯이 한쪽 구석으로 풀썩 쓰러졌다. 화살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br>
<br>
표범의 목덜미를 물고 흔들어댔다. 하지만 표범은 이미 다리와 꼬리를 쭉뻗고 절명해버린 상태<br>
<br>
였다. 표범은 그 용맹함과는 달리 허망하리만큼 총탄에 약하다. 그래서 급소에만 맞으면 공기총<br>
<br>
보다 조금 위력이 강한 22구경 소총에도 힘없이 쓰러져버린다. 실제로 표범과 사촌간인 미국의 <br>
<br>
퓨마사냥에 22구경의 권총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다.<br>
<br>
손경위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온산이 떠나가도<br>
<br>
록 고함을 질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박포수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이렇게 <br>
<br>
외쳤다.<br>
<br>
“큰일났습니다! 화살을 이대로 놔두면 죽어요!”<br>
<br>
손경위는 깜짝 놀라 표범 옆에 쓰러져 있는 화살을 돌아보았다. 왼쪽 목에서 어깨를 거쳐 가슴<br>
<br>
까지 반월형으로 길게 찢겨진 상처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격돌의 순간 표범이 내지른 앞발<br>
<br>
톱이 마치 단도를 힘주어 그어댄 듯 깊은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br>
<br>
손경위는 혀를 빼물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화살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멧돼지 사냥을 하면<br>
<br>
서 몇번이나 중상을 입었던 화살이었다. 그정도의 상처쯤은 지혈과 소독만으로 치유할 수 있을 <br>
<br>
듯했다.<br>
<br>
“다행히 죽을 만큼 깊<br>
<br>
은 상처는 아닌 것 같은데요?”<br>
<br>
"무슨 소립니까?”<br>
<br>
박포수가 거칠게 반박했다.<br>
<br>
"표범 발톱에는 뱀독보다 더 무서운 독이 들어있습니다! 북청군에서 표범 독 때문에 퉁퉁 부어 <br>
<br>
죽은 여자 얘기도 못 들어봤습니까?”<br>
<br>
표범의 발톱에는 썩은 고기에서 옮은 강한 세균이 기생하고 있다. 원로 수렵인 이상오씨는 이 <br>
<br>
균의 정체를‘가스성 부패균’으로 기록하고 있다. 감염자의 십중팔구는 하루도 못 넘기고 죽을 <br>
<br>
정도로 강력한 균이었다.<br>
<br>
이 균은 고기가 잘 썩는 여름철에는 특히 맹위를 떨치지만 드물게 겨울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br>
<br>
다. 기이한 일은 이 가스성 부패균은 한국의 표범에게서는 발견되지만 아프리카의 표범에게서는 <br>
<br>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br>
<br>
“빨리 들꿩이라도 잡아오시오!”<br>
<br>
박포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손경위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어리둥절해 하자 박포수가 더<br>
<br>
욱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br>
<br>
“독을 빼내려면 닭고기가 필요한데 없으니 꿩이라도 잡아 써야죠!”<br>
<br>
박포수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화살의 상처를 입으로 빨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피<br>
<br>
투성이가 되었다. 손경위도 서둘러 표범 굴 위의 바위로 뛰어 올라가 들꿩이 있음직한 곳을 찾<br>
<br>
아보았다. 하지만 마음만 급해서인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br>
<br>
손경위는 모제르 총에 부착되어 있는 4배율 차이스 조준경으로 주변을 샅샅이 살펴 보았다. 역<br>
<br>
시 들꿩은커녕 아무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br>
<br>
손경위는 좀더 높은 바위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문득 하늘에서 선회비행을 하는 서너마리<br>
<br>
의 독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독수리들은 넓은 평지 같은 동곡산 정상 위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br>
<br>
하며 빙빙 돌고 있었다. 순간 손경위의 눈에서 반짝 빛이 났다.<br>
<br>
‘꿩 대신 독수리라도 잡아야 해!’<br>
<br>
독수리들은 몇 분간 그리던 원을 점점 좁히더니 바위절벽 한구석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손<br>
<br>
경위는 독수리들이 착륙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화살을 생각<br>
<br>
하면 한시가 급한 일이었다.<br>
<br>
300m쯤 갔을까? 독수리 한마리가 급강하하면서 바로 앞 절벽의 큰 바위 위에 사뿐히 내려 앉았<br>
<br>
다. 거리는 400m.조금만 더 접근하면 모제르총으로 충분히 명중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br>
<br>
손경위는 자세를 낮추고 바위 사이로 이동하여 사격위치를 잡았다. 차이스 조준경에 독수리의 <br>
<br>
험상궂은 형상이 손에 잡힐 듯 나타났다. 독수리의 시선은 손경위를 넘어서 죽어 넘어진 표범을 <br>
<br>
향해 있었다.<br>
<br>
독수리는 필경 표범에게 입맛을 다시고 있을 것이었다. 독수리는 보기에 따라서 흉포한 외모를 <br>
<br>
하고 있지만 사실은 살생을 거의 못하는 평화지향형의 새이다. 직접 사냥은 하지 못하고 그저 <br>
<br>
동물의 시체나 먹고 살 뿐이었다.<br>
<br>
독수리는 자신이 조준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표범의 시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br>
<br>
손경위는 독수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br>
<br>
"탕!”<br>
<br>
모제르총에서 발사된 8㎜탄은 순식간에 독수리를 바위 밑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독수리는 두손<br>
<br>
으로 들기에도 힘들만큼 묵직했다. 손경위는 독수리를 질질 끌다시피하면서 화살이 있는 곳으로 <br>
<br>
돌아왔다. 손경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박포수는 사냥칼을 빼들고 독수리의 살을 얇게 저<br>
<br>
며냈다.<br>
<br>
“서두릅시다. 원칙적으로는 닭고기라야 제격이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겠지<br>
<br>
요.”<br>
<br>
박포수는 벌겋게 살점이 벌어져 있는 화살의 상처 부위에 얇게 베어낸 독수리의 살을 꼭꼭 다져 <br>
<br>
넣었다. 그리고 사냥때마다 갖고 다니는 철제 구급함을 열었다.박포수는 새사냥같이 간단한 사<br>
<br>
냥길에도 꼭<br>
<br>
구급함을 챙겨가지고 다녔다. 그것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비명에 죽은 봉팔이 아버지 때<br>
<br>
문에 생겨난 버릇이기도 했다.<br>
<br>
구급함에는 놀랍게도 수술용 실과 바늘이 들어있었다. 설파제같은 구급약이나 붕대, 주사기정도<br>
<br>
나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손경위는 박포수의 용의 주도한 준비성에 감탄했다.<br>
<br>
“화살을 꼭 붙드십시오. 몸부림칠지도 모르니까.”<br>
<br>
박포수는 독수리 살이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화살의 상처부위를 듬성듬성 대여섯 바늘 꿰맸다.<br>
<br>
"이렇게 하면 독수리 살이 독을 흡수하게 될 겁니다. 독기가 빠지면 그때 제대로 꿰매줍시다.”<br>
<br>
“화살이 살아날까요?”<br>
<br>
"지켜봅시다. 빨리 손을 썼으니 살아날 가능성이 높습니다.”<br>
<br>
독이 오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다른 동물의 살점을 이용하는 민간요법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br>
<br>
른 여러 나라에도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닭고기로 표범 발톱의 <br>
<br>
독을 빼내는 것은 우리나라 전래의 독제거 방법이었다.<br>
<br>
인디언들도 독사에게 물렸을 때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치료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파상풍에 <br>
<br>
감염될 우려가 있는 큰 상처에 돼지 생껍질을 덮어서 치료한다.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에서는 칼<br>
<br>
과 창에 찔려 만신창이가 된 중환자를 아예 창자를 들어낸 소의 뱃속에 며칠간 넣어두어 소생시<br>
<br>
키기도 했다고 한다.<br>
<br>
박포수가 화살의 응급처치를 끝내자 손경위는 그와 함께 표범을 살펴보았다 .표범은 생각했던 <br>
<br>
것보다 작았다. 북한의 표범은 만주표범 또는 우수리 표범으로 분류되는 대형표범이다. 그래서 <br>
<br>
간혹 호랑이로 오인될 만큼 거대한 놈이 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표범은 작은데다 볼품없이 <br>
<br>
깡말라 있었다. 여름철이라서 털상태도 형편없었다. <br>
<br>
두사람이나 죽인 표범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군요.”<br>
<br>
손경위가 허탈하게 말했다.<br>
<br>
표범의 가슴은 손경위가 쏜 8㎜ 모제르 총탄과 박포수가 쏜 구토리 탄환에 산산이 부서져 있었<br>
<br>
다. 그런데 피로 범벅되어 있는 가슴에 또다른 상처가 있었다. 손경위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죽<br>
<br>
은 풍산개가 마지막 힘을 다해서 물고 늘어진 흔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br>
<br>
특이한 것은 표범의 왼쪽 귀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아문 것으로 보아 오래 전에 <br>
<br>
입은 상처인 듯했다. 지름이 연필 굵기만한 것으로 보아 빠른 탄속을 가진 7.63㎜ 모제르 권총<br>
<br>
탄이 통과한 자국이었다.<br>
<br>
‘당영이 발사한 권총탄에 맞은 것이 분명해.’<br>
<br>
손경위는 그것이 로켓과 함께 좋은 증거가 되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손경위는 표범을 잡아 일<br>
<br>
으켜 보았다. 이번에는 목부근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다. 목의 중간이 마치 모래시계처럼 움<br>
<br>
푹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br>
<br>
무엇인가 표범의 목을 단단히 감고 있지 않다면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손경위는 급히 털 속에 <br>
<br>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놀랍게도 표범의 목살에 깊숙이 몇 겹으로 꼬은 철사가 묶여있었다. 철사<br>
<br>
는 검게 녹슨채 기도와 식도가 있는 목 아래쪽 피부를 파고들어 있었다.<br>
<br>
“이러고도 살아있었다니! 그래서 그렇게 작고 가죽만 남아있었던 거군요.”<br>
<br>
박포수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br>
<br>
"누가 새끼 적에 잡아다가 철사로 묶어 기른 것 같군요. 그리고 다 성장하기도 전에 도망을 쳤<br>
<br>
을테구요.”<br>
<br>
몸은 날로 자라는데 철사는 늘어나지 않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손경위는 철사를 훑<br>
<br>
다가 딱딱한 물체를 만지게 되었다. 노루뿔을 얇게 갈아 불에 달군 송곳으로 글씨를 새긴 이름<br>
<br>
표같은 것이었다.<br>
<br>
‘봉숙이.’<br>
<br>
졸필이었지만 분명 그렇게 씌어있었다.<br>
<br>
"하하하! 어떤 인간인지 참 밥먹고 할일이 없었나보다! 뭐? 봉숙이?”<br>
<br>
"지금 뭐라고 했소?”<br>
<br>
박포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br>
<br>
박포수가 노루뿔 조각을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 손경위의 머릿속에도 뭔가 섬광처럼 지나가는 <br>
<br>
것이 있었다.<br>
<br>
'봉숙이 봉숙이… 봉팔이.’<br>
<br>
박포수는 금방 졸필의 주인공을 알아보았다.<br>
<br>
“역시 봉팔이 글씨군요. 망할 놈! 기를 만한 걸 길러야지. 표범에게도 못할 짓하고, 다른 사람<br>
<br>
들에게도 피해주고….”<br>
<br>
그제서야 손경위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미스터리가 풀렸다. 당영 사건은 사람의 손길에 익숙한 <br>
<br>
표범이 강아지처럼 그들 부부를 따라가다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일이 분명했다.<br>
<br>
또한 봉팔이 독약을 묻힌 닭미끼를 뿌려가면서까지 표범을 잡으려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br>
<br>
손경위가 식인표범을 잡으면 당연히 철사목줄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br>
<br>
표범에게 목줄을 걸어 기르는 것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거니와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br>
<br>
된 것도 봉팔이로 인해 일어난 일들이었다. 박포수는 머릿속으로 그간의 일들을 정리하고 있었<br>
<br>
는지 이렇게 말했다.<br>
<br>
“표범은 봉팔이한테서 도망쳐서 멀리 북청군 같은 데서 산 듯합니다. 그리고 당영을 죽인 전후<br>
<br>
로 해서 이 지역으로 돌아왔겠지요. 목줄이 조여오니 더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어쨌든 봉팔<br>
<br>
이만이 고통을 덜어줄 것이라는 본능이 이 근처까지 오게 했을 테구요.”<br>
<br>
손경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먹이도 못 넘기면서 끔찍스런 나날을 보냈을 표범이 가엾어<br>
<br>
졌다.<br>
<br>
'죽어서라도 평안히 가거라.’<br>
<br>
손경위는 표범의 철사목줄을 끊어 주었다. 비록 사람을 죽인 놈이기는 하지만 증오심은 일어나<br>
<br>
지 않았다. 표범에게 있어 죽음이란 영원한 해방일 수도 있었다.<br>
<br>
때맞추어 총각이 지게를 지고 나타났다. 손경위가 물었다.<br>
<br>
“수고했다. 시신은 잘 묻어주었나?”<br>
<br>
“네, 양지바른 곳을 골라 묻어주었습지요.”<br>
<br>
박포수는 총각이 가져온 배낭 속에서 담요를 꺼내 표범의 시체를 감싸 지게에 얹었다. 그리고 <br>
<br>
그 위에 화살을 뉘었다.<br>
<br>
“표범을 싸놓지 않으면 화살이 지게 위에서 날뛸 수도 있거든요.”<br>
<br>
박포수가 말했다. 화살은 심한 출혈과 상처의 고통 때문인지 꼼짝 앉고 누워 있었다.<br>
<br>
일행은 약수천가로 내려 갔다. 초조히 기다리고 있던 이남식이 만세를 부르듯 펄쩍펄쩍 뛰며 기<br>
<br>
뻐했다.<br>
<br>
“드디어 해내셨군요! 명월구 본서에서 주둥이만 놀리던 놈들 코가 납작해 지겠는데요?”<br>
<br>
이종석은 그때까지도 꽁꽁 묶인 채 입에는 몇겹의 재갈을 물고 羚駭?이종석은 일행을 보자 살려<br>
<br>
달라는 듯 버둥거렸다 .이남식이 양손바닥을 탁탁치며 말했다.<br>
<br>
“하도 주둥이를 놀리길래 손좀 봐줬지요.”<br>
<br>
“빨리 명월구로 돌아갑시다. 여기서는 산판의 트럭을 빌려타고 가다가 풍산서에 부탁해서 도문<br>
<br>
으로 본서 트럭을 갖고 나오라고 하지요.”<br>
<br>
손경위는 총각집에 도착하자 모자를 불러 후하게 숙박료를 지불했다. 그 액수는 명월구의 고급 <br>
<br>
일본여관에 묵는 비용보다 훨씬 많았다.<br>
<br>
그리고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행을 뒷수발해준데 대한 사례비도 따로 얹어주었다. 출장비에 비하<br>
<br>
면 아무것도 아닌 돈이었지만 총각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br>
<br>
일행은 늦은 오후쯤 원래 숙박했던 나흥리에 도착했다. 강포수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이 벌써 <br>
<br>
소식을 듣고 몰려나왔다. 강포수는 아직도 다리가 낫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br>
<br>
“그 식인표범이 죽었다니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듯하구만요. 그 사이 밤마실은 커녕 <br>
<br>
뒷간에도 못 갔다니까요.”<br>
<br>
박포수의 사촌 형집에서는 일행과 동네사람들에게 김칫국과 꿩고기국물에 만 귀밀쌀 국수를 내<br>
<br>
놓았다. 개마고원의 진미인 귀밀쌀은 원래 밀의 일종이지만 쌀보다 더 쫄깃했다.<br>
<br>
밤이 되자 화살의 상처부위가 베개를 붙여놓은 듯 무섭게 부어올랐다. 화살은 기진맥진해 혀를 <br>
<br>
빼물고 헐떡거리기만 했다.<br>
<br>
“독수리살을 닭고기로 바꿔야겠습니다.”<br>
<br>
박포수는 닭을 가져오라고 해 그 자리에서 독수리 살을 닭고기로 바꿔주었다. 하지만 화살은 여<br>
<br>
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br>
<br>
“내일 아침이 고비겠군요. 기다려봅시다.”<br>
<br>
손경위와 이남식은 교대로 밤을 새우며 이종석과 화살을 살폈다. 아침이 되자 다행히 화살은 머<br>
<br>
리를 들고 꼬리를 흔드는등 호전되는 기미를 보였다.<br>
<br>
“이제 됐습니다! 역시 닭고기가 최곱니다. 이것도 다 봉팔이 아버지한테 배운 기술인데 아들녀<br>
<br>
석 때문에 다시 써먹게 되는군요.”<br>
<br>
박포수가 닭고기를 갈아주며 허탈하게 말했다. 점심때가 지나자 화살은 몸을 곧추세우고 일어서<br>
<br>
려고까지 했다. 박포수는 손을 털고 일어나며 모두에게 말했다.<br>
<br>
“이제 출발해도 좋을 듯합니다.”<br>
<br>
일행은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일행은 두만강 건너 도문에서 트럭을 바꿔타<br>
<br>
고 다음날 오후 늦게 명월구로 무사히 귀환했다.<br>
<br>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완수하다니 고생 많았다.”<br>
<br>
손경위 일행을 맞이한 혼다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 있었다. 항상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br>
<br>
그였지만 손경위를 보자 양팔을 활짝 벌려보이며 진심으로 환대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br>
<br>
하지만 손경위의 경과보고<br>
<br>
를 듣고는 얼굴이 굳어졌다.<br>
<br>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쌍매년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는 얘기 아니냐?”<br>
<br>
혼다는 한번 화나면 물불 안가리고 난리를 치는 성격이었다. 손경위는 어차피 해결된 일인데 감<br>
<br>
정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br>
<br>
“뭐,그런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장님,때로는 초연한 모습도 연출하실 필요가 있<br>
<br>
습니다. 모든 것은 법이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게다가 쌍매 계획이 성공한 것도 아니잖습니까?<br>
<br>
”<br>
<br>
“하하하! 그래. 그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러기로 하자.”<br>
<br>
보고를 마친 손경위는 쌍매를 찾아갔다. 표범 시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이미 한바탕 광란을 부린 <br>
<br>
끝이라 머리며 얼굴이 엉망이었다. 손경위는 쌍매에게 로켓을 돌려주었다.<br>
<br>
“내가 죽기를 바랬소? 하지만 그랬다면 이것을 돌려줄 사람이 있었겠소?”<br>
<br>
쌍매는 떨리는 손으로 로켓을 받아들었다. 마약조직의 여왕벌로서 많은 죄를 지었지만 어쨌든 <br>
<br>
남편을 잘못 만나 잘못된 삶에 발을 디뎠고 끝내는 그 남편마저 잃은 가여운 여인이었다.<br>
<br>
”남편 일은 참 안됐소. 하지만 그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더 잘 알 거요. 나중에 출소<br>
<br>
하면 새로운 삶을 사시오.”<br>
<br>
“죽을 죄를 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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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혼다는 손경위 박포수 이남식을 미노야 요정으로 불러 거나하게 한 턱을 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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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휘영청 떠있는 늦여름의 일본식 정원 한구석에 커다란 매화 화분이 흥취를 더욱 돋워주고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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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기분좋게 취기가 오른 혼다가 매화 화분을 가리키며 주인에게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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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코 상! 매화는 쌍으로 놓고 보아야 한층 더 요염하게 보이는 법인데 어째 한쪽이 썰렁해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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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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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의 말이 쌍매를 염두에 둔 농담이라는 것을 알리 없는 노부코는 굽실거리며 대답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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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서장님! 당장 한 그루 더 갖다 놓습지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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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은 최선을 다한 사나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 그것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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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끝--<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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