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허무의식의 기저(基底)
- 「유혹」에 대하여
1. ‘마광수문학’의 이해를 위한 전제
‘마광수 문학’은 이제 한국문화의 한 상징적 코드이다. ‘야한 여자론’(<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으로 시작되어 우리 사회의 ‘성(性)의식’이 규율하는 금기에 적지 않은 기간 혈혈단신 고투를 벌여온 그의 문학적 행보는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논점을 형성하고 있다. 1992년의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에서 한 정점을 이루었던 ‘표현의 자유’ 문제는 이후에도 그의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사법 당국이나 문학계(文學界) 안에서 ‘뜨거운 감자’로 논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문학이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성에 관한 정밀 묘사와 서술이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제한 수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회적 규범이 강력한 금제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에 관한 담론과 표현물들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광범위하게 표출되고 있는 오늘의 문화 현실에서도 언어적 기호로 상상된 문학적 구성물이 여전히 검열이라는 제동장치에 묶여 있음을 반증해 주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성에 관한 문학적 표현은 굳이 사드나 바타이유를 위시한 서구 작가들의 과격한 성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 사회의 원리 안에서 유연하게 수용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예술에 관한 한 사법적 판단이나 윤리적 제약보다는 문학 시장의 구조 안에서 자율적으로 논의되고 수용되는 유통 과정이 우리 사회의 문화 체질과 자생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마광수문학, 더 나아가 성문학에 대한 사회 내부의 의식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마광수의 신작 장편소설 <유혹>을 읽으면서 이 점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경직된 의식이 그의 문학에 내장된 성적 무의식과 판타지, 미적 감각을 형성하는 구체적 항목들과 불필요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마광수의 문학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분방한 성적 상상력은 신작 장편소설 <유혹>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마광수는 이번 작품에서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의 30대에서 <즐거운 사라>(1992)의 40대를 거쳐 <광마잡담>(2005)과 <로라>(2005), <유혹>(2006)의 50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문학을 관통하고 있는 성적 상상력의 세밀한 감각들을 독창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문학 세계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들로 ‘페티시즘’, ‘탐미적 관능’, ‘관능적 상상력’ ‘관능적 일탈미’ ‘유미적 평화주의’ 등을 들 수 있을 터인데, 유미적 상상력 차원에서 탐미적 관능미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는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여 <유혹>에서는 성적 판타지의 문제를 카타르시스의 실제적 효용성이라는 차원에 접목시켜 형상화하고 있다.
이번 소설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 한 가지는 그의 분방한 성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내면 원리로서 실존적 허무의식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의 문학적 내면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깊이 논의되지 못하고 간과된 것이 사실인데, 이번 소설에서는 그의 미의식과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실존적 허무의식이 성치료라는 독창적 모티프를 선명하게 노정되고 있다. 아울러, 마광수문학의 핵심 기제로 작동하는 카타르시스의 문제가 상징적 회로가 아니라 실제적 효용으로서 문학치료의 영역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시인과 소설가 이전에 문학연구자로서 오랫동안 카타르시스의 실제적 효용성 문제를 탐구해 온 그의 문학에 대한 기본 입장이 <권태>(1990, 개정판 2005년), <광마일기>(1990, 개정판 1996), <즐거운 사라>(1991, 개정판 1992), <불안>(1996), <자궁 속으로>(1998),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2000), <광마잡담>(2005), <로라>(2005) 등의 작품을 경유하여 <유혹>에서 자유롭게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미 <즐거운 사라>에서도 시도되었던 ‘열린 결말’의 구조를 그는 이번 작품에서 다시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유혹>에서 시작과 전개와 종결이라는 종래의 소설 기본 문법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닫힌 구조’의 이야기를 배제하고 있다. 결말이 완결되는 닫힌 소설이 아니라 끝이 결정되지 않는 순환 원리로서 무언가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지 않는 열린 소설의 구조에 대한 실험을 작가는 <유혹>에서 시도하고 있다.
2. 카타르시스의 문학적 효용론
마광수 문학은 기본적으로 그가 독자적으로 추구해 온 문학관에 토대를 두고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여러 이론서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효용론’에 바탕을 둔 문학의 카타르시스를 강조한다. 문학이 인간의 정신에 실제적으로 어떤 효용성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고, 이런 관심은 그의 문학 전반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그의 문학에 충만한 성적 판타지나 관능적 이미지, 유미적 상상력은 바로 문학의 궁극적 효용성으로서 문학을 통해 현실 속에서 억눌린 감정을 자연스럽게 배출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마광수의 문학관은 효용론이라는 관점에서 독자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부각된다.
문학의 효용성에 관한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과 직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6장에서,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통하여 감정을 카타르시스(catharsis)시킨다”고 말한 바 있는데, ‘정화’ 또는 ‘배설’을 의미하는 카타르시스는 문학이 독자에게 주는 직접적인 영향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마광수는 바로 이 카타르시스 이론의 중요성을 수용한 이후 이에 근거하여 ‘효용론으로서의 카타르시스 문제’를 집중 탐구해 왔고, 거기에 그의 주된 관심사인 성적 미의식과 결합하여 그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카타르시스와는 달리 동양사상에 뿌리를 두고서 음양사상과 한방의학 이론, 그리고 불교사상에 접목시켜 자신의 문학관을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다.
마광수의 카타르시스이론을 중심으로 한 문학관의 정체를 좀 더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 는 정신적 개념으로서만이 아니라 의학적·육체적 개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즉 그의 이론대로 카타르시스를 ‘배설’로 해석할 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배설, 억압된 심리적 욕구의 해방이라는 정신적 의미만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아울러 포괄하는 인체의 종합적이고도 유기체적인 대사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활동을 물질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의 한쪽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으로 보아 일원론적으로 인식한 한방의학의 개념이 요청된다. 그는 서양의 비극적 카타르시스 개념 대신 희극적 카타르시스 역시 중요한 효용이 있다고 진단하고, 여기에 사상의학(四象醫學)에서 말하는 체질론(體質論)을 추가하여 독자 위주의 유연한 효용론을 전개한다.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현대인들에게 문학이 단지 심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인간 치료의 실용주의적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보고자 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마광수는 자신의 독자적인 카타르시스이론을 줄곧 문학 작품에 반영하는 글쓰기를 해 왔는데, <유혹> 역시 이런 연장선 위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학병원 정신과 교수인 주인공 이경훈은 서양 의학에 자신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한방을 도입하여 치료를 하는데, 결국 이런 이단적 행위가 발단이 되어 그는 동료 교수들로부터 비판과 따돌림을 당학 병원을 그만둔다. 물론 경훈이 대학병원의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여성 환자와의 스캔들 때문이지만, 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 한의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그의 독특한 치료술이다. 이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실제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양의학 혹은 한방의학에 대한 지식을 작품 안에서 주인공의 치료 행위에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효용론의 관점에서 일종의 치료제로 받아들일 때 정신과 의사라는 주인공의 직업 설정과 치료 행위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문학관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혹>은 성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로서 주인공이 다양한 유형의 성불구 환자들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과정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남녀 관계의 애증 및 성의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면 심리를 다루고 있다. 그림을 전공했고, 화랑을 경영하는 30대 중반의 독신 여성 타미, 아버지에 대해 품었던 적개심을 아버지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에게 투사하여 복수하려는 잠재의식을 위장하여 결혼하지만 그것이 원인이 되어 불감증 환자로서 부부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방숙,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여 상대하는 여자를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애증병존 심리로 인해 잠재의식에 축적된 죄의식 때문에 발기부전이 되어 이혼을 하고 그 충격으로 성적 고통에 시달리는 T교수, 여성 동경의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남자대학생 이성기 등의 여러 인물들은 경훈의 효과적인 성치료를 받고 병을 극복해나간다. 성치료 전문의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성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여러 유형의 환자들을 치료한다는 작가의 구도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치로서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작가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인공 이경훈의 성적 취향을 환자 이성기의 성적 고민에 결부시키고 있는 발상은 문학의 효용론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생각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따져볼 때 이성기는 복장도착증에다가 나르시시즘, 그리고 관음증적 취향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남자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의 몸뚱어리 전체를 하나의 미적 숭배 대상으로서의 물신적(物神的) 우상으로 보는 페티시즘(fetishism) 심리가 마음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경훈은 이성기를 보며, 어쩌면 자기도 이 환자와 비슷한 패턴의 인간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에게는 동성연애 심리가 전혀 없고, 또 복장도착 증세나 여성동경의 심리가 아주 심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217쪽)
페미니스트이자 일종의 탐미적 페티시스트로서 이성기는 경훈이 고용한 성치료 보조원인 민자의 적극적인 치료를 받으면서 서서히 회복되어간다. 경훈과 이성기는 복장도착증과 나르시시즘과 관음증적 취향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여성을 미적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페티시스트라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경훈은 이성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읽어낸다. 이 작품에서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점은 작가가 이전 작품에서 추구해 온 관능적 미의식으로서의 페티시즘이나 유미적 상상력을 성치료라는 구체적인 과정에 도입하여 적용하고 있는 장면이다. 특히 경훈이 독특한 성적 매력을 지닌 민자라는 여성을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되고, 이후 성치료 보조원으로 고용하여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이 무척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런 장면들은 문학이라는 허구적 장치 속에서 작가가 구상하고 있는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문학의 실제적 효용성에 관한 그의 일관된 발언들이 작품 안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독자심리학적 맥락에서 생각할 때 <유혹>의 인물들의 행위가 연출하는 여러 계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권태로운 일상의 삶에서 일정한 활력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현실에서는 윤리적 억제로 인해 억압돼 있던 가학욕구를 문학작품이라는 장치를 통해서라도 대리배설시켜 울체(鬱滯)된 잠재의식을 해방시키려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일탈적이고 가학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문학 등의 예술작품을 ‘인공적인 길몽’으로 보고 있으며, 그 대리배설적 효용가치를 옹호하는 한에서 좋은 꿈을 인위적으로라도 더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작가는 <유혹>에서 성치료라는 모티프를 활용하여 반영하고 있다.
<유혹>의 주요 관심사인 문학의 실제적 효용성 문제와 관련하여 작가의 생각을 몇 가지 더 알아보도록 하자. 마광수는 여러 글에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세계를 “유미적(唯美的) 쾌락주의에 바탕을 둔 복지지상주의(福祉至上主義)”(<복지지상주의를 위하여>,<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렇게 될 때 이데올로기의 폐해와 독선적인 종교의 폐단이 가져다준 같은 인류간의 상쟁사(相爭史)가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여러 저술과 문학 작품에서 강조하고 있는 유미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평화주의는 그의 독특한 미의식과 어울려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보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며 관능적 상상력을 키워 준 것은 언제나 ‘손톱’의 이미지였다. 특히 나는 여인의 긴 손톱을 너무나 사랑한다. 손톱은 원시시대의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일종의 가학적 무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수처럼 날카로운 여인의 긴 손톱은 새디즘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가학적인 용도로 쓰이던 손톱이 이제 화사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변했다는 점, 그로테스크한 관능미의 심볼로 변했다는 점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를 밝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희망적인 예감을 얻는다. 인간의 가학성이 미의식과 합치되어 아름다운 환타지로 승화될 수 있을 때, 진정한 인류의 평화, 전쟁이 없는 세계가 건설될 수 있다. 주관과 객관, 감정과 사상, 관념과 사물의 대립을 지양하고 그것을 생동력 있게 통일시킬 수 있는 근원적 에너지가 바로 ‘환타지’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관념적 사랑이 아닌 성애적(性愛的) 사랑이 합치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당당한 쾌락추구에 기초하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책머리에>)
누구나 잘 사는 사회, 누구나 스스로의 야한 아름다움을 나르시시즘으로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즐거운 노동’, 이를 테면 화장이나 손톱기르기 등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동에서 진짜 관능적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미주의에 바탕을 둔 쾌락주의, 또는 복지지상주의(福祉至上主義)가 요즘의 내 신조라면 신조라고 할 수 있다. (…) 즐거운 권태와 감미로운 퇴폐미의 결합을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은 우리의 사고를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꿈이 없는 현실은 무의미한 것이고 꿈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꿈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 실천을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책머리에>)
한편 작가는 포르노 영화나 소설 같은 에로티시즘 예술이 실제로 성의학에 이용되고 있으며, 성적 공상이 성행위시에 더욱 큰 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누구나 편안하게 성적 공상을 하면서 거기에 덧붙여 에로틱 아트를 당당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성적 억압이나 성적 무기력증 때문에 생기는 정신적 병리현상이나 불행한 남녀관계는 해결될 수 있다. 자극적인 성희 장면이나 내용을 담은 영화나 소설 또는 사진 작품 등을 성적 흥분을 돕기 위해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전혀 죄될 일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어떤 형태로든 ‘자극’을 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로틱 아트를 활용하여 성욕을 보다 더 ‘상승적으로’ 배설시킬 권리가 있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 억압된 욕구들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카타르시스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물론 정신적 정화에 의한 일시적 망각이 아니라 시원한 대리배설로서 말이다. 예술이 경건주의를 벗어나 보다 더 솔직해질 수 있을 때 인간의 삶은 더욱 활기차고 건강해질 수 있고, 보다 더 밝은 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에로틱 아트의 긍정적 효용>, <문학과 성>, 315쪽)
위의 글에서 읽을 수 있듯이 마광수는 에로티시즘 예술이 자기 취향에 맞는 성적 환상을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에로티시즘 예술에 대한 논의는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신 건강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성의 문제가 지금보다 더 개방되고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성을 중심으로 한 에로틱 아트가 긍정적 효용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이제 성의 개방화 시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성욕의 자유로운 대리배설은 아직은 머나먼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는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와 집단적 기만으로 얽혀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솔직한 대중들은 점점 더 떳떳한 성욕의 대리배설을 원할 것이고, 거기에 발맞춰 에로티시즘 예술은 기존의 수구적 봉건윤리를 항상 앞서갈 것이 틀림없다. 합리적 지성이 주재하는 정치적·문화적 후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에로티시즘 예술을 시급히 양성화시킬 필요가 있다.”(<에로틱 아트의 긍정적 효용>, <문학과 성>, 317쪽)
성의 자유, 또는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한 나라의 정치적 민주화와 분배정의의 실현, 사회복지, 다양한 문화적 가치 발달과 정비례 관계에 있다. 이것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다. 성에 대한 억압과 ‘이중 잣대’가 없어지고 성에 대한 법의 간섭이 최소화될수록, 그 나라의 구성원들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가 확대되고 불평등이 축소되어 경제적 재분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한국 성문화의 현황 및 진단>, 위의 책, 322쪽)
3. 실존적 허무의식의 발현
마광수는 여러 논문과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문학을 구성하는 사상적 자양분이 기본적으로 불교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우리들 인간이 비극에서 느끼는 심리적 고통과, 카타르시스 효과에서 오는 예술적 쾌감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는데 이 점을 그는 불교사상의 논리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마광수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서 불교의 진리는 중요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이 점은 역시 <유혹>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준다.
그는 불교의 진리 가운데 이른바 사성제(四聖諦)의 진리와 오온(五蘊) 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자신의 문학에 반영한다. 즉 사성제(四聖諦) 개념의 핵심은 인간의 현실생활 자체가 생·노·병·사 등의 고통으로 가득 찬 비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고통의 원인인 마음의 집착, 즉 욕심을 없애기 위해서 바른 도를 지켜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성불하기 위해 도를 닦으려면 먼저 고(苦)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선결과제가 된다. 즉 인생살이에서 누구나 추구하는 인생의 보람이나 행복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고 오직 비극적 고통만이 충만할 뿐이라는 사실을 선결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세계와 물질의 법칙을 지배하는 현상세계의 오온은 모두 다 빈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며, 원래 실체가 없는 텅 빈 것이기 때문에 온갖 허망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현상들 가운데는 기쁨과 슬픔, 쾌락과 고통, 미움과 사랑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마광수가 파악하고 있는 고제(苦諦)란 것의 진정한 의미는, 실제로 우리의 본성 그 자체가 고통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비관주의적이고 염세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극히 낙관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개념에서 나오는 고(苦)의 진리를 우선 인정한 후 그것을 인간존재의 긍정적 의미를 깨닫기 위한 득도 과정에서의 과정적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것이 불교사상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다. 아울러 이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의 의미와도 합치된다고 파악한다. 고(苦)의 깨달음은 인간이 불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데, 그는 불교의 ‘고제’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일상의 삶에 내재된 실존적 허무의식을 도출해낸다.
비극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공포, 즉 비극적 고통의 감정이 어떻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그는 불교사상의 사성제(四聖諦) 개념인 고(苦)의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하면서 카타르시스의 문제를 음양의 상징이론에 확대시켜 적용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특히 한방의학과 카타르시스를 연결시켜 논의한 것은, 마광수 문학론의 특징인 ‘연역적 상징 이론과 구체적 효용성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적 지평을 구체적으로 열어 보여준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행복감(幸福感)은 찰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일생은 무조건 비극이다. 석가가 깨달았다는‘고제(苦諦)’는 그래서 중요하다. 모든 중생들은 오직 고통스럽다는 진리…… 그것을 석가는 평생 동안 설파하였다. 그런 실존적 허무의식을 일단 깨달아야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진다. 막연한 낙관주의처럼 인간을 허망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즉, 궁(窮)할대로 궁해져야만 ‘통(通)’의 상태가 온다. 비극이 실존의 전부라는 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불행을 극복해 낼 수 있다. 절망보다 더 두려운 것이 희망이다. 희망을 죽여버려라. (<마광쉬즘>, 2006, 98~99 쪽)
이렇게 볼 때 작가가 여러 글에서 강조하는 ‘야(野)한 자각’은 이와 같은 실존적 허무를 깨닫는 것이고, 따라서 ‘야한 정신’은 허무정신이면서 실존적 비극정신의 깨달음(<마광쉬즘>, 99쪽)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다양한 성치료의 양상을 표면에 과도하게 노출하고 있는 <유혹>에서 주인공 경훈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생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비극성과 실존적 허무의식을 반영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존재 자체가 증오스럽다. 프로이트의 시대가 ‘성적(性的) 좌절’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실존적 좌절’의 시대다. 실존적 좌절은 권태를 낳고, 권태감은 사람들을 우울증으로 몰아간다. 갱년기에 찾아오는 무력감 때문에 생기는 우울증이나 어이없는 실연(失戀) 따위로 찾아오는 우울증, 또는 극도의 열등감에 기인하는 우울증 등은 차라리 치료하기 쉽다. 그러나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일상사와 거기서 누적된 권태감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만성적인 우울증은 오히려 치료하기가 어렵다.(<유혹>, 47~48쪽)
실존적 허무주의는 이미 그의 앞선 작품들에서도 피력된 바 있는데, 영상시나리오로 구상된 <권태를 위한 메모>에서 “관능적으로는 무척이나 열정적이지만, 인생관 그 자체는 허무주의적이라는 것”(<야하디 얄라숑>)을 강조한 것이라든지, 시작품에서 “사랑을 하면 할수록 외로워져요/사랑을 하면 할수록 죽고 싶어져요/당신의 헛된 약속/나의 헛된 주절거림/아 모든 건 안개 속 술래잡기 놀이/같이 몸을 합쳐도 계속되는 고적감”(<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지>)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작가의 뿌리 깊은 허무의식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치료를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묘사에 바탕을 둔 <유혹>의 이야기 이면에는 세계에 대한 철저한 허무주의자의 비극적 인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4. ‘열린 결말’의 의미
마광수는 이미 <즐거운 사라>에서 결말을 의도적으로 해피엔딩과는 정반대인 비극적 결말로 처리하지 않았다. 흔히 죽음이나 파멸로 결말을 마무리하여 ‘사랑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주제로 삼는 기존 소설의 통념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주인공 사라가 추구하는 사랑의 ‘자유성’에 대한 인식을 열어 놓음으로써 주인공에게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생명력을 부여하는 동시에 독자에게도 역시 열린 상상의 계기를 제공해 주려는 의도에서 결말 처리를 그렇게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즐거운 사라에서 이야기의 결말을 열어놓음으로써 소설 속의 사라를 시대의 윤리에 희생되어야 할 속죄양이 아니라 확장된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의 당당한 행복을 추구하는 적극적 인물로 만들어내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마광수의 소설 세계, --<즐거운 사라>의 이해를 위하여>(<마광수 살리기>)를 볼 것)
<유혹>에서도 작가는 역시 결말을 열어놓음으로써‘열린 소설’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작가가 다음과 같이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데에서도 ‘열린 결말’의 구조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그 고민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결말로 치닫기 위해 돌연한 교통사고나 돌연한 자살 같은 것이 곧 등장할지도 모른다 ……. 또는 내가 의료행위를 빙자한 매매춘을 시켰다는 죄목으로 잡혀가게 될지도 모르고…….경훈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288~289쪽)
주인공 경훈으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소설의 결말이 꼭 비극적이거나 일정한 매듭을 지으며 종결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문을 작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우푸트만이나 브레히트의 드라마가 추구하는 이른바 ‘개방형 종결’ 형식의 드라마에서 극의 결말이 앞에서 진행되어 온 이야기와 사건의 완벽한 마무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미결정’이나 ‘미해결’을 의미하듯이, 작가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이야기의 분명한 결말을 어떤 형태로든 확정하여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사라>와 마찬가지로 <유혹>에서 작가는 ‘닫힌 소설’의 구조만이 플롯을 잘 짠 소설로 간주되는 문학 풍토에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5. 마광수 문학의 불온성
마광수의 문학은 우리 사회의 통념이 강요하는 현실에서 근본적으로 불온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가 밝히고 있듯이 본질적으로 문학은 불온하며, 문학은 항상 현실에 대해 일탈적이고 가치전복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본질적으로 문학은 불온하다>, <야하디 얄라숑>).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반란”으로서 문학은 “즐거운 저항”이며 “과거에 대한/끊임없는 회의요/미래에 대한/끊임없는 꿈꾸기”를 할 수 있는 정신의 탈주 장치이기도 하다. 동시에 문학은 “우리를 억압하고 순치(馴致)시키는/권력과 윤리에 대한/끊임없는 조소”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온한 문학은 시대와 불화하고, 작가는 시대와 사회의 금제로부터의 고통을 피하기 어렵다.
인간의 내적 체험의 소산인 금기와 위반들은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우리 내부에 감추어진 욕망들로부터 생겨난 것들이다. 조르주 바타이유가 금기와 관계하는 근본적인 것들로 ‘죽음’과 ‘성’을 들면서(<에로티즘>), 금기의 구심력과 위반의 원심력 사이에서 억압된 본능을 현시하며 사회적 금기를 간접적으로 위반함으로써 우리들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을 탈주시키는 계기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문학의 본질적인 특성으로서 ‘불온성’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마광수의 문학 역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진정한 섹슈얼리티는 ‘윤리’와 ‘정상’을 거부하는 ‘창조적 불복종’에 있는 것이다.(<마광쉬즘>, 115쪽). <유혹>에서 작가는 세상의 감시에 움츠리지 않고 이 점을 말하고 있다.
- 「유혹」에 대하여
1. ‘마광수문학’의 이해를 위한 전제
‘마광수 문학’은 이제 한국문화의 한 상징적 코드이다. ‘야한 여자론’(<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으로 시작되어 우리 사회의 ‘성(性)의식’이 규율하는 금기에 적지 않은 기간 혈혈단신 고투를 벌여온 그의 문학적 행보는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논점을 형성하고 있다. 1992년의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에서 한 정점을 이루었던 ‘표현의 자유’ 문제는 이후에도 그의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사법 당국이나 문학계(文學界) 안에서 ‘뜨거운 감자’로 논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문학이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성에 관한 정밀 묘사와 서술이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제한 수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회적 규범이 강력한 금제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에 관한 담론과 표현물들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광범위하게 표출되고 있는 오늘의 문화 현실에서도 언어적 기호로 상상된 문학적 구성물이 여전히 검열이라는 제동장치에 묶여 있음을 반증해 주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성에 관한 문학적 표현은 굳이 사드나 바타이유를 위시한 서구 작가들의 과격한 성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 사회의 원리 안에서 유연하게 수용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예술에 관한 한 사법적 판단이나 윤리적 제약보다는 문학 시장의 구조 안에서 자율적으로 논의되고 수용되는 유통 과정이 우리 사회의 문화 체질과 자생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마광수문학, 더 나아가 성문학에 대한 사회 내부의 의식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마광수의 신작 장편소설 <유혹>을 읽으면서 이 점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경직된 의식이 그의 문학에 내장된 성적 무의식과 판타지, 미적 감각을 형성하는 구체적 항목들과 불필요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마광수의 문학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분방한 성적 상상력은 신작 장편소설 <유혹>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마광수는 이번 작품에서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의 30대에서 <즐거운 사라>(1992)의 40대를 거쳐 <광마잡담>(2005)과 <로라>(2005), <유혹>(2006)의 50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문학을 관통하고 있는 성적 상상력의 세밀한 감각들을 독창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문학 세계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들로 ‘페티시즘’, ‘탐미적 관능’, ‘관능적 상상력’ ‘관능적 일탈미’ ‘유미적 평화주의’ 등을 들 수 있을 터인데, 유미적 상상력 차원에서 탐미적 관능미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는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여 <유혹>에서는 성적 판타지의 문제를 카타르시스의 실제적 효용성이라는 차원에 접목시켜 형상화하고 있다.
이번 소설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 한 가지는 그의 분방한 성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내면 원리로서 실존적 허무의식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의 문학적 내면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깊이 논의되지 못하고 간과된 것이 사실인데, 이번 소설에서는 그의 미의식과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실존적 허무의식이 성치료라는 독창적 모티프를 선명하게 노정되고 있다. 아울러, 마광수문학의 핵심 기제로 작동하는 카타르시스의 문제가 상징적 회로가 아니라 실제적 효용으로서 문학치료의 영역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시인과 소설가 이전에 문학연구자로서 오랫동안 카타르시스의 실제적 효용성 문제를 탐구해 온 그의 문학에 대한 기본 입장이 <권태>(1990, 개정판 2005년), <광마일기>(1990, 개정판 1996), <즐거운 사라>(1991, 개정판 1992), <불안>(1996), <자궁 속으로>(1998),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2000), <광마잡담>(2005), <로라>(2005) 등의 작품을 경유하여 <유혹>에서 자유롭게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미 <즐거운 사라>에서도 시도되었던 ‘열린 결말’의 구조를 그는 이번 작품에서 다시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유혹>에서 시작과 전개와 종결이라는 종래의 소설 기본 문법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닫힌 구조’의 이야기를 배제하고 있다. 결말이 완결되는 닫힌 소설이 아니라 끝이 결정되지 않는 순환 원리로서 무언가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지 않는 열린 소설의 구조에 대한 실험을 작가는 <유혹>에서 시도하고 있다.
2. 카타르시스의 문학적 효용론
마광수 문학은 기본적으로 그가 독자적으로 추구해 온 문학관에 토대를 두고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여러 이론서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효용론’에 바탕을 둔 문학의 카타르시스를 강조한다. 문학이 인간의 정신에 실제적으로 어떤 효용성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고, 이런 관심은 그의 문학 전반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그의 문학에 충만한 성적 판타지나 관능적 이미지, 유미적 상상력은 바로 문학의 궁극적 효용성으로서 문학을 통해 현실 속에서 억눌린 감정을 자연스럽게 배출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마광수의 문학관은 효용론이라는 관점에서 독자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부각된다.
문학의 효용성에 관한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과 직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6장에서,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통하여 감정을 카타르시스(catharsis)시킨다”고 말한 바 있는데, ‘정화’ 또는 ‘배설’을 의미하는 카타르시스는 문학이 독자에게 주는 직접적인 영향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마광수는 바로 이 카타르시스 이론의 중요성을 수용한 이후 이에 근거하여 ‘효용론으로서의 카타르시스 문제’를 집중 탐구해 왔고, 거기에 그의 주된 관심사인 성적 미의식과 결합하여 그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카타르시스와는 달리 동양사상에 뿌리를 두고서 음양사상과 한방의학 이론, 그리고 불교사상에 접목시켜 자신의 문학관을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다.
마광수의 카타르시스이론을 중심으로 한 문학관의 정체를 좀 더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 는 정신적 개념으로서만이 아니라 의학적·육체적 개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즉 그의 이론대로 카타르시스를 ‘배설’로 해석할 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배설, 억압된 심리적 욕구의 해방이라는 정신적 의미만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아울러 포괄하는 인체의 종합적이고도 유기체적인 대사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활동을 물질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의 한쪽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으로 보아 일원론적으로 인식한 한방의학의 개념이 요청된다. 그는 서양의 비극적 카타르시스 개념 대신 희극적 카타르시스 역시 중요한 효용이 있다고 진단하고, 여기에 사상의학(四象醫學)에서 말하는 체질론(體質論)을 추가하여 독자 위주의 유연한 효용론을 전개한다.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현대인들에게 문학이 단지 심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인간 치료의 실용주의적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보고자 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마광수는 자신의 독자적인 카타르시스이론을 줄곧 문학 작품에 반영하는 글쓰기를 해 왔는데, <유혹> 역시 이런 연장선 위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학병원 정신과 교수인 주인공 이경훈은 서양 의학에 자신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한방을 도입하여 치료를 하는데, 결국 이런 이단적 행위가 발단이 되어 그는 동료 교수들로부터 비판과 따돌림을 당학 병원을 그만둔다. 물론 경훈이 대학병원의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여성 환자와의 스캔들 때문이지만, 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 한의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그의 독특한 치료술이다. 이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실제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양의학 혹은 한방의학에 대한 지식을 작품 안에서 주인공의 치료 행위에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효용론의 관점에서 일종의 치료제로 받아들일 때 정신과 의사라는 주인공의 직업 설정과 치료 행위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문학관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혹>은 성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로서 주인공이 다양한 유형의 성불구 환자들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과정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남녀 관계의 애증 및 성의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면 심리를 다루고 있다. 그림을 전공했고, 화랑을 경영하는 30대 중반의 독신 여성 타미, 아버지에 대해 품었던 적개심을 아버지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에게 투사하여 복수하려는 잠재의식을 위장하여 결혼하지만 그것이 원인이 되어 불감증 환자로서 부부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방숙,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여 상대하는 여자를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애증병존 심리로 인해 잠재의식에 축적된 죄의식 때문에 발기부전이 되어 이혼을 하고 그 충격으로 성적 고통에 시달리는 T교수, 여성 동경의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남자대학생 이성기 등의 여러 인물들은 경훈의 효과적인 성치료를 받고 병을 극복해나간다. 성치료 전문의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성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여러 유형의 환자들을 치료한다는 작가의 구도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치로서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작가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인공 이경훈의 성적 취향을 환자 이성기의 성적 고민에 결부시키고 있는 발상은 문학의 효용론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생각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따져볼 때 이성기는 복장도착증에다가 나르시시즘, 그리고 관음증적 취향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남자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의 몸뚱어리 전체를 하나의 미적 숭배 대상으로서의 물신적(物神的) 우상으로 보는 페티시즘(fetishism) 심리가 마음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경훈은 이성기를 보며, 어쩌면 자기도 이 환자와 비슷한 패턴의 인간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에게는 동성연애 심리가 전혀 없고, 또 복장도착 증세나 여성동경의 심리가 아주 심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217쪽)
페미니스트이자 일종의 탐미적 페티시스트로서 이성기는 경훈이 고용한 성치료 보조원인 민자의 적극적인 치료를 받으면서 서서히 회복되어간다. 경훈과 이성기는 복장도착증과 나르시시즘과 관음증적 취향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여성을 미적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페티시스트라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경훈은 이성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읽어낸다. 이 작품에서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점은 작가가 이전 작품에서 추구해 온 관능적 미의식으로서의 페티시즘이나 유미적 상상력을 성치료라는 구체적인 과정에 도입하여 적용하고 있는 장면이다. 특히 경훈이 독특한 성적 매력을 지닌 민자라는 여성을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되고, 이후 성치료 보조원으로 고용하여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이 무척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런 장면들은 문학이라는 허구적 장치 속에서 작가가 구상하고 있는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문학의 실제적 효용성에 관한 그의 일관된 발언들이 작품 안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독자심리학적 맥락에서 생각할 때 <유혹>의 인물들의 행위가 연출하는 여러 계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권태로운 일상의 삶에서 일정한 활력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현실에서는 윤리적 억제로 인해 억압돼 있던 가학욕구를 문학작품이라는 장치를 통해서라도 대리배설시켜 울체(鬱滯)된 잠재의식을 해방시키려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일탈적이고 가학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문학 등의 예술작품을 ‘인공적인 길몽’으로 보고 있으며, 그 대리배설적 효용가치를 옹호하는 한에서 좋은 꿈을 인위적으로라도 더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작가는 <유혹>에서 성치료라는 모티프를 활용하여 반영하고 있다.
<유혹>의 주요 관심사인 문학의 실제적 효용성 문제와 관련하여 작가의 생각을 몇 가지 더 알아보도록 하자. 마광수는 여러 글에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세계를 “유미적(唯美的) 쾌락주의에 바탕을 둔 복지지상주의(福祉至上主義)”(<복지지상주의를 위하여>,<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렇게 될 때 이데올로기의 폐해와 독선적인 종교의 폐단이 가져다준 같은 인류간의 상쟁사(相爭史)가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여러 저술과 문학 작품에서 강조하고 있는 유미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평화주의는 그의 독특한 미의식과 어울려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보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며 관능적 상상력을 키워 준 것은 언제나 ‘손톱’의 이미지였다. 특히 나는 여인의 긴 손톱을 너무나 사랑한다. 손톱은 원시시대의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일종의 가학적 무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수처럼 날카로운 여인의 긴 손톱은 새디즘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가학적인 용도로 쓰이던 손톱이 이제 화사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변했다는 점, 그로테스크한 관능미의 심볼로 변했다는 점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를 밝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희망적인 예감을 얻는다. 인간의 가학성이 미의식과 합치되어 아름다운 환타지로 승화될 수 있을 때, 진정한 인류의 평화, 전쟁이 없는 세계가 건설될 수 있다. 주관과 객관, 감정과 사상, 관념과 사물의 대립을 지양하고 그것을 생동력 있게 통일시킬 수 있는 근원적 에너지가 바로 ‘환타지’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관념적 사랑이 아닌 성애적(性愛的) 사랑이 합치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당당한 쾌락추구에 기초하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책머리에>)
누구나 잘 사는 사회, 누구나 스스로의 야한 아름다움을 나르시시즘으로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즐거운 노동’, 이를 테면 화장이나 손톱기르기 등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동에서 진짜 관능적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미주의에 바탕을 둔 쾌락주의, 또는 복지지상주의(福祉至上主義)가 요즘의 내 신조라면 신조라고 할 수 있다. (…) 즐거운 권태와 감미로운 퇴폐미의 결합을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은 우리의 사고를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꿈이 없는 현실은 무의미한 것이고 꿈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꿈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 실천을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책머리에>)
한편 작가는 포르노 영화나 소설 같은 에로티시즘 예술이 실제로 성의학에 이용되고 있으며, 성적 공상이 성행위시에 더욱 큰 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누구나 편안하게 성적 공상을 하면서 거기에 덧붙여 에로틱 아트를 당당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성적 억압이나 성적 무기력증 때문에 생기는 정신적 병리현상이나 불행한 남녀관계는 해결될 수 있다. 자극적인 성희 장면이나 내용을 담은 영화나 소설 또는 사진 작품 등을 성적 흥분을 돕기 위해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전혀 죄될 일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어떤 형태로든 ‘자극’을 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로틱 아트를 활용하여 성욕을 보다 더 ‘상승적으로’ 배설시킬 권리가 있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 억압된 욕구들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카타르시스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물론 정신적 정화에 의한 일시적 망각이 아니라 시원한 대리배설로서 말이다. 예술이 경건주의를 벗어나 보다 더 솔직해질 수 있을 때 인간의 삶은 더욱 활기차고 건강해질 수 있고, 보다 더 밝은 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에로틱 아트의 긍정적 효용>, <문학과 성>, 315쪽)
위의 글에서 읽을 수 있듯이 마광수는 에로티시즘 예술이 자기 취향에 맞는 성적 환상을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에로티시즘 예술에 대한 논의는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신 건강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성의 문제가 지금보다 더 개방되고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성을 중심으로 한 에로틱 아트가 긍정적 효용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이제 성의 개방화 시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성욕의 자유로운 대리배설은 아직은 머나먼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는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와 집단적 기만으로 얽혀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솔직한 대중들은 점점 더 떳떳한 성욕의 대리배설을 원할 것이고, 거기에 발맞춰 에로티시즘 예술은 기존의 수구적 봉건윤리를 항상 앞서갈 것이 틀림없다. 합리적 지성이 주재하는 정치적·문화적 후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에로티시즘 예술을 시급히 양성화시킬 필요가 있다.”(<에로틱 아트의 긍정적 효용>, <문학과 성>, 317쪽)
성의 자유, 또는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한 나라의 정치적 민주화와 분배정의의 실현, 사회복지, 다양한 문화적 가치 발달과 정비례 관계에 있다. 이것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다. 성에 대한 억압과 ‘이중 잣대’가 없어지고 성에 대한 법의 간섭이 최소화될수록, 그 나라의 구성원들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가 확대되고 불평등이 축소되어 경제적 재분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한국 성문화의 현황 및 진단>, 위의 책, 322쪽)
3. 실존적 허무의식의 발현
마광수는 여러 논문과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문학을 구성하는 사상적 자양분이 기본적으로 불교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우리들 인간이 비극에서 느끼는 심리적 고통과, 카타르시스 효과에서 오는 예술적 쾌감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는데 이 점을 그는 불교사상의 논리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마광수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서 불교의 진리는 중요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이 점은 역시 <유혹>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준다.
그는 불교의 진리 가운데 이른바 사성제(四聖諦)의 진리와 오온(五蘊) 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자신의 문학에 반영한다. 즉 사성제(四聖諦) 개념의 핵심은 인간의 현실생활 자체가 생·노·병·사 등의 고통으로 가득 찬 비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고통의 원인인 마음의 집착, 즉 욕심을 없애기 위해서 바른 도를 지켜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성불하기 위해 도를 닦으려면 먼저 고(苦)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선결과제가 된다. 즉 인생살이에서 누구나 추구하는 인생의 보람이나 행복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고 오직 비극적 고통만이 충만할 뿐이라는 사실을 선결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세계와 물질의 법칙을 지배하는 현상세계의 오온은 모두 다 빈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며, 원래 실체가 없는 텅 빈 것이기 때문에 온갖 허망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현상들 가운데는 기쁨과 슬픔, 쾌락과 고통, 미움과 사랑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마광수가 파악하고 있는 고제(苦諦)란 것의 진정한 의미는, 실제로 우리의 본성 그 자체가 고통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비관주의적이고 염세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극히 낙관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개념에서 나오는 고(苦)의 진리를 우선 인정한 후 그것을 인간존재의 긍정적 의미를 깨닫기 위한 득도 과정에서의 과정적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것이 불교사상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다. 아울러 이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의 의미와도 합치된다고 파악한다. 고(苦)의 깨달음은 인간이 불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데, 그는 불교의 ‘고제’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일상의 삶에 내재된 실존적 허무의식을 도출해낸다.
비극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공포, 즉 비극적 고통의 감정이 어떻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그는 불교사상의 사성제(四聖諦) 개념인 고(苦)의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하면서 카타르시스의 문제를 음양의 상징이론에 확대시켜 적용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특히 한방의학과 카타르시스를 연결시켜 논의한 것은, 마광수 문학론의 특징인 ‘연역적 상징 이론과 구체적 효용성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적 지평을 구체적으로 열어 보여준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행복감(幸福感)은 찰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일생은 무조건 비극이다. 석가가 깨달았다는‘고제(苦諦)’는 그래서 중요하다. 모든 중생들은 오직 고통스럽다는 진리…… 그것을 석가는 평생 동안 설파하였다. 그런 실존적 허무의식을 일단 깨달아야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진다. 막연한 낙관주의처럼 인간을 허망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즉, 궁(窮)할대로 궁해져야만 ‘통(通)’의 상태가 온다. 비극이 실존의 전부라는 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불행을 극복해 낼 수 있다. 절망보다 더 두려운 것이 희망이다. 희망을 죽여버려라. (<마광쉬즘>, 2006, 98~99 쪽)
이렇게 볼 때 작가가 여러 글에서 강조하는 ‘야(野)한 자각’은 이와 같은 실존적 허무를 깨닫는 것이고, 따라서 ‘야한 정신’은 허무정신이면서 실존적 비극정신의 깨달음(<마광쉬즘>, 99쪽)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다양한 성치료의 양상을 표면에 과도하게 노출하고 있는 <유혹>에서 주인공 경훈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생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비극성과 실존적 허무의식을 반영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존재 자체가 증오스럽다. 프로이트의 시대가 ‘성적(性的) 좌절’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실존적 좌절’의 시대다. 실존적 좌절은 권태를 낳고, 권태감은 사람들을 우울증으로 몰아간다. 갱년기에 찾아오는 무력감 때문에 생기는 우울증이나 어이없는 실연(失戀) 따위로 찾아오는 우울증, 또는 극도의 열등감에 기인하는 우울증 등은 차라리 치료하기 쉽다. 그러나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일상사와 거기서 누적된 권태감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만성적인 우울증은 오히려 치료하기가 어렵다.(<유혹>, 47~48쪽)
실존적 허무주의는 이미 그의 앞선 작품들에서도 피력된 바 있는데, 영상시나리오로 구상된 <권태를 위한 메모>에서 “관능적으로는 무척이나 열정적이지만, 인생관 그 자체는 허무주의적이라는 것”(<야하디 얄라숑>)을 강조한 것이라든지, 시작품에서 “사랑을 하면 할수록 외로워져요/사랑을 하면 할수록 죽고 싶어져요/당신의 헛된 약속/나의 헛된 주절거림/아 모든 건 안개 속 술래잡기 놀이/같이 몸을 합쳐도 계속되는 고적감”(<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지>)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작가의 뿌리 깊은 허무의식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치료를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묘사에 바탕을 둔 <유혹>의 이야기 이면에는 세계에 대한 철저한 허무주의자의 비극적 인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4. ‘열린 결말’의 의미
마광수는 이미 <즐거운 사라>에서 결말을 의도적으로 해피엔딩과는 정반대인 비극적 결말로 처리하지 않았다. 흔히 죽음이나 파멸로 결말을 마무리하여 ‘사랑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주제로 삼는 기존 소설의 통념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주인공 사라가 추구하는 사랑의 ‘자유성’에 대한 인식을 열어 놓음으로써 주인공에게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생명력을 부여하는 동시에 독자에게도 역시 열린 상상의 계기를 제공해 주려는 의도에서 결말 처리를 그렇게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즐거운 사라에서 이야기의 결말을 열어놓음으로써 소설 속의 사라를 시대의 윤리에 희생되어야 할 속죄양이 아니라 확장된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의 당당한 행복을 추구하는 적극적 인물로 만들어내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마광수의 소설 세계, --<즐거운 사라>의 이해를 위하여>(<마광수 살리기>)를 볼 것)
<유혹>에서도 작가는 역시 결말을 열어놓음으로써‘열린 소설’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작가가 다음과 같이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데에서도 ‘열린 결말’의 구조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그 고민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결말로 치닫기 위해 돌연한 교통사고나 돌연한 자살 같은 것이 곧 등장할지도 모른다 ……. 또는 내가 의료행위를 빙자한 매매춘을 시켰다는 죄목으로 잡혀가게 될지도 모르고…….경훈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288~289쪽)
주인공 경훈으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소설의 결말이 꼭 비극적이거나 일정한 매듭을 지으며 종결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문을 작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우푸트만이나 브레히트의 드라마가 추구하는 이른바 ‘개방형 종결’ 형식의 드라마에서 극의 결말이 앞에서 진행되어 온 이야기와 사건의 완벽한 마무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미결정’이나 ‘미해결’을 의미하듯이, 작가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이야기의 분명한 결말을 어떤 형태로든 확정하여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사라>와 마찬가지로 <유혹>에서 작가는 ‘닫힌 소설’의 구조만이 플롯을 잘 짠 소설로 간주되는 문학 풍토에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5. 마광수 문학의 불온성
마광수의 문학은 우리 사회의 통념이 강요하는 현실에서 근본적으로 불온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가 밝히고 있듯이 본질적으로 문학은 불온하며, 문학은 항상 현실에 대해 일탈적이고 가치전복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본질적으로 문학은 불온하다>, <야하디 얄라숑>).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반란”으로서 문학은 “즐거운 저항”이며 “과거에 대한/끊임없는 회의요/미래에 대한/끊임없는 꿈꾸기”를 할 수 있는 정신의 탈주 장치이기도 하다. 동시에 문학은 “우리를 억압하고 순치(馴致)시키는/권력과 윤리에 대한/끊임없는 조소”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온한 문학은 시대와 불화하고, 작가는 시대와 사회의 금제로부터의 고통을 피하기 어렵다.
인간의 내적 체험의 소산인 금기와 위반들은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우리 내부에 감추어진 욕망들로부터 생겨난 것들이다. 조르주 바타이유가 금기와 관계하는 근본적인 것들로 ‘죽음’과 ‘성’을 들면서(<에로티즘>), 금기의 구심력과 위반의 원심력 사이에서 억압된 본능을 현시하며 사회적 금기를 간접적으로 위반함으로써 우리들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을 탈주시키는 계기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문학의 본질적인 특성으로서 ‘불온성’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마광수의 문학 역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진정한 섹슈얼리티는 ‘윤리’와 ‘정상’을 거부하는 ‘창조적 불복종’에 있는 것이다.(<마광쉬즘>, 115쪽). <유혹>에서 작가는 세상의 감시에 움츠리지 않고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출처 : 마광수 따라가기
글쓴이 : 광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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