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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스크랩]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시모음

by 3856 2007. 4. 11.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시모음
 글쓴이 : 농월
: 2006.12.31 13:03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시모음

 

만해 한용운은 독립 운동가며 승려인 동시에 민족시인 이다

만해는 충남 홍성 출생으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1905년 인제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승려가 되었다. 일본의 정점 기에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불교관계 항일단체에서 활약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 백담사에서는 만해의 시 세계인 만해 축전이 이 열리고 있고 광복61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야속한 세월탓인지 인간이 변한 것인지 광복절날이 되어도 태극기를 다는 집들도 별로 없다. 새삼 만해 선사가 그립다. 그 님이 조국이든 사랑하는 연인이든 절절히 가슴을 저미는 고백들이 어지러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꾸짓고 있다.  평소에 민족의 선구자 시인 만해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옥같은 시들을  눈에 보일때마다 소중히 모아 두었던 것을 8.15를 기하여 두서없이 소개하는 바이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견민 遣悶

春愁春雨不勝寒(춘수춘우부승한)-봄 시름에 봄비는 마냥 추워서

春酒一壺排萬難(춘주일호배만난)-봄술 한 병으로 만난을 물리치네.

一杯春酒作春夢(일배춘주작춘몽)-실컷 마신 봄술에 봄꿈을 꾸니

須彌納芥亦復寬(수미납개역부관)-수미산을 개자씨에 넣고도 남네. 


만해는 유달리 추위를 많이 탄 것 같다. 일신을 돌볼 겨를 없이 국가 민족을 위하여 분골쇄신 투쟁하였고 불경 번역과 나름대로의 열과 성을 다한 유신 불사에 일말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로 하여 몸은 약해지고 간호할 마땅한 사람도 없이 동분서주하였으니, 금기로 여기는 술에 자연 가깝게 되어 그것으로 단견의 해결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진다. 봄 추위를 술로 데우고 호방한 기질에 번민을 잊으려고 애쓴 모습이는 것 같다.

 

★견앵화유감 見櫻花有感

昨冬雪如花(작동설여화)-지난 겨울엔 눈이 꽃과 같더니

今春花如雪(금춘화여설)-올 봄에는 꽃이 눈 같구나

雪花共非眞(설화공비진)-눈이나 꽃이 다 참이 아닌데

如何心欲裂(여하심욕열)-어째서 마음이 찢어지려느냐.

벚꽃을 보고 느끼는 시이다. 지난 겨울의 눈은 벚꽃처럼 하얗더니, 봄이 되어 진짜 벚꽃이 피니 이제는 꽃이 눈처럼 허옇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눈이고 어느 것이 꽃인가. 눈은 꽃이요 꽃은 눈이니, 눈은 눈이 아니요 꽃은 꽃이 아니다. 기다 아니다의 이 구별의 상념에 잡혀 있자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이다. 왜(如何) 그래야 할까. 그러니 있는 대로 놓아 두자. 눈은 눈이요 꽃은 꽃이다.

 

★견월 見月 달을 보다

幽人見月色(유인견월색)-외로운 사람 달빛을 바라보니

一夜總佳期(일야총가기)-한 밤이 모두 아름다운 시기이네

聊到無聲處(료도무성처)-애오라지 소리 없는 곳에서

也尋有意詩(야심유의시)-짐짓 의미 있는 시를 찾네.

달밤에 시를 쓰는 작자의 마음을 열고 있다. 같은 달이라 하여도 주변의 정황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작자는 고독하고 조용한 사람(幽人)이라 하였다. 누구와의 대화자도 없는 홀로 있는 처지에서 너와 나의 상대로서의 달이다. 그러니까 달이 모든 것을 감싸 안은 셈이다. 그래서 자연스러이 이어진 ‘한 밤이 모두 아름다운 시기(一夜總佳期)’인 것이다.


달은 빛으로서의 아름다움이기에 소리 없음의 아름다움이다. 이 소리 없는 곳에 마음이 닿을 때, 내면에 숨었던 마음의 소리는 오히려 더 잘 들린다. 이것이 바로 “뜻 있음의 시(有意詩)”를 찾게 되는 까닭이다.

 

★고유 孤遊

半生遇歷落(반생우력락)-반평생 지나친 기구한 일들

窮北寂寥遊(궁북적요유)-궁박한 북녘으로 쓸쓸히 떠돌아 왔네.

冷宵說風雨(냉소설풍우)-차가운 밤, 비바람 걱정하노니

晝回髮髮秋(주회발발추)-날 새면 머리칼에 가을 짙으리.


만해가 만주로 망명한 것은 1911년이라 했으므로 30대 초반의 일이다. 그때 이 시를 쓴 것이라 짐작된다. 바람처럼 표표히 떠돌면서도 박은식(朴殷植), 이시영(李時榮), 윤세복(尹世復)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다고 한다. 아직 젊은 나이라 백발 타령은 아니지만 차가운 가을이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칼에 스쳐 감을 읊은 시로 생각된다.


★관락매유감 觀落梅有感

宇宙百年大活計(우주백년대활계)-한평생 우주를 펄펄 살게 하려는데

寒梅依舊滿禪家(한매의구만선가)-찬 매화 옛같이 절에 가득 피네.

回頭欲問三生事(회두욕문삼생사)-머리 돌려 삼생일 묻고자 하니

一秩維摩半落花(일질유마반락화)-한 질 유마경에 반 떨어진 꽃일러라.


한편의 칠언절구에 지나지 않지만 뜻이 매우 웅혼하다. 마음은 우주에다 걸었다. 석가모니가 그랬고, 지나간 모든 부처님들이 그랬다. 우주에다 대활기를 불어넣겠다는 것이다.찬 매화 핀 소식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절간에 가득 찬 옛부터 내려오는 진리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말이라 해야 옳다고 본다. 진리의 꽃핌이 눈앞에 도래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직시한 입장이라면 물러설 수 없는 일, 일생일대의 대본업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구암사초추 龜岩寺初秋 

古寺秋來人自空(古寺秋來人自空)-옛 절에 가을 들자 사람들 절로 마음 비우고

匏花高發月明中(匏花高發月明中)-박꽃은 높이높이 밝은 달 아래에 피었다

霜前南峽楓林語(霜前南峽楓林語)-서리 오기 전 남쪽 언덕 단풍의 속삭임은

? 見三枝數葉紅(? 見三枝數葉紅)-겨우 서너 가지 두어 잎의 진홍 빛 보이네.


구암사의 첫 가을이라는 시이다. 자연 사물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계절이 가을이다. 다시 말해 온갖 사물이 공의 비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도 이 때면 어딘가 허전하다. 마음이 저절로 비워지는 것이 아닌가. 인자공(人自空) 사람들이 저절로 비운다. 이 저절로(自)의 한 글자의 묘미가 전편의 시의를 북돋고 있는 감이 든다.

박꽃은 저녁의 꽃이다. 줄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 핀다. 빛깔은 순백색이다. 밝은 달밤에 피는 이 흰 꽃, 하늘의 달빛과 땅의 꽃빛이 한데 어울어져 온통 은백색으로 변한 가을의 밤이다. 시제에서도 “초추”라 하였으니 아직 서리 내리기 전임이 분명하다.

 

★귀암폭 龜岩瀑

秋山瀑布急(추산폭포급)-가을 산 폭포소리 성급히 쏟아지니

浮世愧殘春(부세괴잔춘)-뜬 세상 늙은 몸 부끄러워라.

日夜欲何往(일야욕하왕)-밤낮 어디로 헤매이는가

回看千古人(회간천고인)-머리 돌려 옛 분들 그려 보느니.


폭포 앞에 서면 서는 사람의 나이나 처지에 따라 그 느낌이 다 달라질 것이다. 계절에 따라서도 그 느낌에는 차이가 있으리라고 본다. 만해는 의리심과 대의를 무엇보다 무겁게 생각하고 민족적 국가적 사항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서서 분골쇄신 몸을 바쳐 왔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관심이 그렇게 합당하지도 않았던 것 같고, 하물며 격려나 협조도 미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기러기 노래 獄中作

一雁秋聲遠(일안추성원)-가을 기러기 한 마리 멀리서 울고

數星夜色多(수성야색다)-밤에 헤아리는 별 색도 다양하네

燈深猶未宿(등심유미숙)-등불 짙어지니 잠도 오지 않는데

獄吏問歸家(옥리문귀가)-옥리는 집에 가고 싶지 않는가 묻는다.

天涯一雁叫(천애일안규)-하늘 끝 기러기 한 마리 울며 지나가니

滿獄秋聲長(만옥추성장)-감옥에도 가득히 가을 바람소리 뻗치는구나

道破蘆月外(도파노월외)-갈대가 쓰러지는 길 저 밖의 달이여

有何圓舌椎(유하원설추)-어찌하여 너는 둥근 쇠몽치 혀를 내미는 거냐.

옥중에서 지은시다


★기학생 寄學生(학생에게 부친다―옥중작)

瓦全生爲恥(瓦全生爲恥)-헛된 삶 이어가며 부끄러워하느니

玉碎死亦佳(玉碎死亦佳)-충절 위해 깨끗이 죽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滿天斬荊棘(滿天斬荊棘)-하늘 가득 가시 자르는 고통으로

長嘯月明多(長嘯月明多)-길게 부르짖지만 저 달은 많이 밝다.

제목으로 보아 면회를 온 학승에게 전해준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와전(瓦全)’과 ‘옥쇄(玉碎)’는 정반대의 뜻이다. 아무 보람도 없이 헛된 삶을 이어가는 ‘와전’과 명예와 충절을 지켜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는 ‘옥쇄’를 시에다 써 감옥 바깥으로 전하는 일 자체가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기개를 굽히고 사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옥중에서 시로 썼으니 만해의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을 쐐고 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 오든지 오실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대만화 화상만림향장 代萬化 和尙挽林鄕長

君棄人間天上去(군기인간천상거)-그대 이 세상 버리고 천상으로 가느니

人間猶有自心傷(인간유유자심상)-남은 우리들만 슬퍼하노라.

世情白髮不禁淚(세정백발부금루)-세상살이 백발엔 눈물이 나고

歲事黃花正斷腸(세사황화정단장)-철 돌아 국화 피어 애를 끊노나.

哀詞落木寒鴉在(애사낙목한아재)-애달퍼라 마른 나무엔 차갑게 까마귀 내리고

痛哭殘山剩水長(통곡잔산잉수장)-버려진 산천에 통곡은 끝이 없네.

公道斜陽莫可追(공도사양막가추)-뉘라서 지는 해 막는다 하리

秋風秋雨滿衣裳(추풍추우만의상)-가을 바람 찬비만 옷 흠뻑 적시네.


대작(代作)이므로 만화 스님의 입장이 되어 썼다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만화 스님의 뜻과 같이 정서가 엮어졌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인생 4고(四苦)의 마지막 장면인 죽음이란 사항을 두고 인생살이의 세속적 감정을 유감없이 엮어내었다고 보아진다.


★독야 獨夜 

天末無塵明月去(천말무진명월거)-맑디맑은 하늘 끝 밝은 달 가고

孤枕長夜聽松琴(고침장야청송금)-홀로 누운 긴 밤 솔 소릴 듣는다.

一念不出洞門外(일념부출동문외)-마음은 동문 밖 나가지 않고

惟有千山萬水心(유유천산만수심)-오직 산수와 더불어 살고 있네.


★독야  獨夜

玉林垂露月如霰(옥림수로월여산)-고운 숲 이슬은 바로 맺히고 달빛 부스러져

隔水砧聲江女寒(격수침성강녀한)-물 건너 다듬이 소리에 여심은 차가웁다.

雨岸靑山皆萬古(우안청산개만고)-양언덕 푸른 산천 옛모습 그대로인데

梅花初發定僧還(매화초발정승환)-매화꽃 필 적이면 고향 정녕 찾으리.


만해의 밝은 달이 맑디맑은 하늘을 지나고 있다. 흐뭇하고 기쁜 밤이다. 이런 밤에 홀로 있는 재미는 세속을 떠나 있다. 솔바람 소리가 그 재미를 한껏 북돋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재미를 아는 사람이 동문 밖 출입을 달갑게 생각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도리를 표출하고 있다.

차가운 날의 밤 경치가 눈에 선하다. 이슬이 맺히는 걸 보아 늦가을쯤 되는 계절이라 하면 맞을 것 같다. 높은 달빛은 차가움에 싸락눈처럼 부스러져 내리는 느낌을 준다. 이 차가운 정경을 강 건너 다듬이 소리가 고조시키고 있다. 다듬이 소리는 겨울 옷을 다루는 끊임없는 재촉의 소리, 겨울 오기를 재촉하는 소리인 것이다. 이런 정경 속 홀로 상념에 젖어 있던 시인이 문득 꿈에서 깬 듯 주변을 살피고는, 내년 봄 매화꽃 필 즈음이면 고향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나그네의 향수를 그리고 있다. 이 향수는 한편 깨달음을 재촉하는 선객의 각오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독야 獨夜

天末無塵明月去(천말무진명월거)-하늘 끝 먼지 없어 밝은 달이 가고

孤枕長夜聽松聲(고침장야청송성)-외로운 베개 밤도 길어 소나무 소리 듣다

一念不出洞門外(일념부출동문외)-한 생각에도 동구 문 밖 나간 적 없이

惟有千山萬水心(유유천산만수심)-오직 일천 일만 물의 마음만 있네. 


제목에 제시되듯이, 홀로 밤을 지내는 상황이다. 창 밖에는 달만 휘영청 밝아 홀로 가고 있어 자신의 외로움과 처지가 같고, 나는 창 안에서의 외로운 잠자리에 창 밖의 소나무 소리가 벗을 해준다. 표면으로 보이는 것은 이러한 외로움의 극치이나, 이 외로움을 외로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정함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 생각에서라도 이 동구 밖을 나가려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산 둘리고 물 흐르는 이 동구 안에 내 마음을 가두고 있는 것이다. 산 아래 사람에게는 외로움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주인공 만해에게는 즐거움이요, 일천 산 일만 물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보여 주듯이 풍요로움이요 부자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풍요로움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또 그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독좌  獨坐

朔風吹斷侵長夜(삭풍취단침장야)-삭풍 불어 이다지도 긴긴 밤에

隔樹鍾聲獨閉門(격수종성독폐문)-나무 건너 종소리 울리면 홀로 문을 닫는다.

靑燈聞雪寒生火(청등문설한생화)-푸른등은 눈 소리 듣곤 차가운 불 피우고

紅帖剪梅香在文(홍첩전매향재문)-붉은 매화꽃 오려 붙인 무늬엔 향기가 나네.

三尺新琴伴以鶴(삼척신금반이학)-석 자의 거문고엔 학을 짝지우고

一間明月與之雲(일간명월여지운)-한 칸에 달과 구름 더불어 사누나.

偶然思得六朝事(우연사득육조사)-우연히 육조의 일 생각 나서

欲說轉頭未見君(욕설전두미견군)-말하고자 고개 돌리니 그대가 안 계시는구려. 

가난하고 추울수록 밤은 더욱 길어지는 것이다. ‘청등이 차가운 불 피우는’ 대목은 여덟가지 추운 지옥인 팔한지옥(八寒地獄)의 여섯번째에 해당되는 온발라 지옥을 연상케 한다. 청련화(靑蓮華)라고 하는 이곳은 너무 추워서 몸이 터지고 찢어지는 것이 마치 푸른 연꽃 같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도, 매화꽃 오려붙이고 거문고와 학, 달과 구름을 더불어 자연과 함께 살아간 만해는 정말 멋을 아는 분이었다.

옛 분들은 매화꽃을 오려붙여 놓고 매일 한 잎씩 떼어 내면 어느덧 입춘이 되어 봄과 더불어 매화가 피어 왔다고 한다. 추위가 극심한 속에서도 봄을 기다려 맞아들이는 정성이 지극하지 않은가.


★독창풍우 獨窓風雨

四千里外獨傷情(사천리외독상정)-4천 리 밖에서 홀로 상심하니

日日秋風白髮生(일일추풍백발생)-가을 바람 불 적마다 흰머리 생기네.

驚罷晝眠人不見(경파주면인부견)-낮잠을 놀라 깨니 사람이 없고

滿庭風雨作秋聲(만정풍우작추성)-뜰 가득 비바람 소리 가을을 몰아오네. 


4천리는 바다 건너 일본을 말한다. 1908년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10월에 귀국할 때까지 반년 동안 이십 수 가량의 시를 쓴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의 한 수이다. 적국에 갔지만 적의라고는 조금도 비치지 않는 순수 서정시이다. 타국에 온 인간적 고뇌를 그리고 있다.

 

★독풍아주자용동파운부매화용기운부매화 

 讀風雅朱子用東坡韻賦梅花用其韻賦梅花

江南暮雪有孤村(강남모설유고촌)-강남 땅 외딴 마을 저문 눈 내려

玉樹層層降詩魂(옥수층층강시혼)-구슬나무 층층에 시혼 쌓이네.

枝枝散入塞外笛(지지산입새외적)-변방 먼 피리소리 가지가지 들어 피고

纖月蒼凉不染昏(섬월창량부염혼)-저녁 찬 하늘에 고운 달 어리우네.

夜香連娟歸夢寂(야향련연귀몽적)-밤 향기 아리따워 향기가 번지고

十年虛盟負故園(십년허맹부고원)-십 년 헛맹세에 고향만 등졌구나.

却恥春風多榮辱(각치춘풍다영욕)-분별 없는 봄바람은 영욕만 많아

千寒萬寒不事溫(천한만한부사온)-천만 추위 닥쳐도 마다하지 않는다.

嬌態不勝帶晩雨(교태부승대만우)-늦은 비에 교태부릴 수 없듯이

新意那堪向朝暾(신의나감향조돈)-아침 햇살엔들 마음을 빼앗기랴.

左有左松右有竹(좌유좌송우유죽)-이쪽 저쪽 어디에나 솔과 대 있거니

一世相守不掩門(일세상수부엄문)-한평생 서로 지켜 막을 일 없어라.

雖愛高名易成句(수애고명이성구)-누구라도 높은 이름 말하기는 쉽지만

深看佳處還無言(심간가처환무언)-정말로 아름다움 형언할 길 없어라.

君我俱是厭世者(군아구시염세자)-그대 나 다 함께 세상을 싫어하니

芳年未?z共對尊(芳年未?z공대존)-향기 방창할 때 술 한잔 기울이세.


매화를 두고 쓴 이 칠언시(七言詩)는 문장이 매우 미려하다. 그 짜임새와 어조가 빈틈이 없고 호흡이 대단히 긴 편에 속하리라. 먼 강남 땅 외딴 곳 해는 져 어두운데, 그 칠흑의 한기를 누르며 눈이 내린다. 매화꽃 몇 송이 피어난 덩걸 위에 눈은 쌓여 구슬 같은데, 그 위에 시인의 넋이 층층으로 쌓인 것이다. 꽃과 눈이 만나 매운 향기에 선계의 흰빛을 한껏 돋우고 있다. 향기와 빛의 싸늘한 이중주에 시인의 넋이 층층으로 내려와 피어난 것이다.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때마침 국경 너머 불어오는 피리소리가 4중주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날아갈 듯 스러질 듯한 아슬아슬한 미의 꽃이 짙은 향기를 내지르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럴 때 눈은 제 일을 다했다는 듯 내리기를 멈추고, 차가운 하늘에 어슴푸레 달이 비쳐 오는 것이다. 미와 향의 완성을 확인하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차갑고 아리따운 밤 향기에 어쩔 수 없이 향수는 번지고, 금의환향하겠다던 맹세를 이룩하지 못한 뉘우침이 몰려오게 된다. 하지만 훈풍에 함부로 피어나는 분별없는 봄꽃들처럼 절조 없고 격조 없이 헤벌어지는 것보다는 추위 휘몰아쳐 와도 마다하지 않는 절조와 격을 갖추어 살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동경려관청선  東京旅館聽蟬

佳木淸於水(가목청어수)-아름다운 나무 물보다 맑고

蟬聲似楚歌(선성사초가)-사방의 매미소리 초가 같아라.

莫論此外事(막론차외사)-이 밖에 아무 일도 말하지 말라

偏入客愁多(편입객수다)-나그네의 시름만 더할 뿐이니. 


이 시에서의 아름다움과 시름은 상치되는 두 언덕의 정서라 할 것이다.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흐뭇한 정서가 우러나지 못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그 당체(當體)가 나의 바람이나 입장과 상당한 거리가 있거나 대치되는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 바로 그것이겠지만 그것이 시인이 희구하는바 정서와 일치하지 못하는 적대국의 나라에 있기 때문에 시름만 솟구치게 하는 연원일 뿐인 것이라 할 것이다. 매미소리가 사면초가로만 들리는 만해는 당시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라 잃은 나그네의 말할 수 없는 시름과 주체하기 어려운 감정이 용솟음쳤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등고 登高

偶思一極目(우사일극목)-문득 멀리 바라보고 싶어

東彼危岑峰(동피위잠봉)-위태로운 동쪽 묏부리 오르니

人去靑山外(인거청산외)-인적은 청산 밖으로 사라지고

舟行白雨中(주행백우중)-배는 소나기 속을 가누나.

長河遇酒少(장하우주소)-긴 강엔 술 만나기 어렵고

大雪入詩空(대설입시공)-펑펑 쏟아지는 눈은 시의 진경에 드네.

風落枯桐急(풍락고동급)-바람은 마른 오동에 쏟아지고

殘陽映髮紅(잔양영발홍)-볕은 뉘엿뉘엿 내 머릴 붉히네.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 변동의 어느 날 시정을 읊고 있다. 동쪽 묏부리, 청산, 인적, 소나기, 배, 강, 술, 눈, 오동과 같은 가시적 대상들이 촉박하게 번갈아 나타나고 바람과 햇볕까지 곁들여 시인의 정서는 바쁘기만 하다.

인적이 산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곧바로 소나기가 등장하여 강을 지나는 배를 꼼짝없이 사로잡는 장면이 나타나고, 이런 가운데 컬컬한 막걸리 생각 절로 나는 순간에, 난데없이 소나기를 밀쳐 낸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다.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주검과 같은 마른 오동나무에 공연한 바람이 쏟아지고, 저녁볕은 어느덧 시인의 머리칼을 붉게 물들인다는 얘기다.

 

★등불 그림자를 보며 燈影

夜冷窓如水(야냉창여수)-추운 밤 창에 물이 어리면

臥看第二燈(와간제이등)-두 개의 등불 누워서 보게 되지

雙光不到處(쌍광부도처)-두 불빛 못 미치는 이 자리에 있으니

依舊愧禪僧(의구괴선승)-선승인 것 못내 부끄럽기만 하다.


만해는 이 시에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등과, 물 어린 창이 반사하고 있는 두 개의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누워 있는 자리는 두 개의 불빛이 다 못 미치는 곳이다.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감옥이라는 공간을 생각해보면 이 시를 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선승이므로 구도의 길을 걸어가야 하거늘 지금 자신은 완전히 다른 세계, 곧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인 것이다.  


★등선방후원 登禪房後園

兩岸寥寥萬事稀(양안요요만사희)-양언덕 고요하여 만단사가 쉬는 듯

幽人自賞未輕歸(유인자상미경귀)-숨어 살아 스스로 즐기니 돌아가지 않네.

院裡微風日欲煮(원리미풍일욕자)-절 안에 미풍 일고 햇살은 따가워

秋香無數撲禪衣(추향무수박선의)-가을 향기 셀 수 없이 옷을 휘감네. 


양안(兩岸)은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상징한다. 이로(理路)와 사단(事端)이 선정(禪定)의 눈에 확연히 드러난 장면이다. 이를 타파할 사자후가 등장할 직전인 것이다. 적적요요 본자연(寂寂寥寥本自然)의 모습이다. 여기에 재미 붙여 사는 사람이 딴 일에 마음 쏠려 가볍게 움직이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살랑한 바람, 따갑게 햇살 쏟아지는 가을 절 가득 차 오른 향기에 휘감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선미(禪味)의 재미를 이보다 선명히 표출해 내기 힘들 것이라고 본다.


★마관주중 馬關舟中

長風吹盡侵輕夕(장풍취진침경석)-그칠 줄 모르는 바람에 저녁이 내리고

萬水爭飛落日圓(만수쟁비락일원)-다투어 나는 물결에 가득 내리는 낙일이여.

遠客孤舟烟雨裡(원객고주연우리)-이역 나그네 안개비 속 외로운 배 띄워

一壺春酒到天邊(일호춘주도천변)-한 병 봄술로 하늘가에 이르렀네.


섬나라 일본의 항구 시모노세키의 봄 풍경을 그리고 있다. 동풍이 끝없이 불어오는 봄의 해질녘을 바람과 물결과 저녁 해와 안개비를 외로운 배 속에서 어울어 안주 삼아 읊조리고 있다.

 

★무제 無題

桑楡髮已短(상유발이단)-늙은 나이라 머리칼 짧아지고 

葵藿心猶長(규곽심유장)-해바라기 닮아서 마음은 장하다.

山家雪未消(산가설미소)-산집엔 눈이 아직 녹지 않았는데

梅發春宵香(매발춘소향)-매화꽃 피어 봄밤이 향기롭다.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서산대사 오도송에도 “髮白心非白 古人曾漏泄”이란 대목이 있다. 늙어서도 매화꽃 피는 봄밤의 향기를 즐긴다는 말이다.

만해시에서 봄을 노래한 경우, 자연적 조건은 눈이 많이 등장하고, 식물로는 매화가 자주 등장한다. 봄햇빛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하면서 때로는 단순한 느낌을, 때로는 호방한 정서를, 때로는 선취를 노래하고 있다.


★무제 無題

농山鸚鵡能言語(농산앵무능언어)-농산의 앵무새는 말을 잘 할 수가 있는데

愧我不及彼鳥多(괴아부급피조다)-나는 저 새만큼도 잘하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雄辯銀兮沈默金(웅변은혜침묵김)-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 하지마는

此金買盡自由花(차김매진자유화)-나는 이 금으로 자유의 꽃을 다 사고 싶다.

 

〈一日與隣房通話 爲看守竊聽 雙手被輕縛二分間 卽吟〉

〈하루는 이웃 감방과 말을 나누다가 간수에게 들켜서 두 손을 2분 동안 가벼이 묶여 즉석에서 읊다〉는 시이다.

앵무새도 말을 하는데, 사람으로서 말을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서양의 속담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어 말없음이 오히려 값지다 하였지만, 이렇듯 언어의 제약을 받는 처지에서는 차라리 이 금을 팔아 저 자유의 꽃을 사는 편이 흠씬 낫겠다는 자위이다. 즉석에서의 읊음이라 했으니, 선사의 시적 순발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선사의 저항의 고뇌를 여실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무제 無題

庭樹落陰梅雨晴(정수낙음매우청)-뜰 나무 그늘에 장마 그치니

半簾秋氣和禪生(반렴추기화선생)-발에 스미는 가을 기운 선에 어울지네.

故國靑山夢一髮(고국청산몽일발)-고국산천은 꿈 한 겹 차인데

落花深晝渾無聲(락화심주혼무성)-꽃 지는 대낮이 소리 죽이네.


장마 그친 이국 땅 어느 정원의 나무 그늘에 향수와 그리움이 어리는 장면이다. 그리움의 깊숙한 곳에서 스며 오는 서늘한 냉기가 묵묵히 앉아 있는 만해의 사유(思惟)에 어우러진다. 고국산천은 보이는 듯 눈에 선한데, 꽃 지는 대낮의 적막이 엄습해 오는 것이다. 대낮이 죽이고 있는 소리, 그것은 만해의 향수의 울컥한 울음소리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빛 잃은 조국에 대한 연민과 괴로움의 통곡소리라 할 것이다.


★무제 無題

黃河濁水日滔滔(황하탁수일도도)-황하의 흐린 물은 날마다 넘실거려

千載俟淸難一遭(천재사청난일조)-천년을 맑기 기다려도 한 번 만나기 어려운데

豈獨摩尼源可照(기독마니원가조)-어찌 홀로 마니주를 가지고 원천만 비추었나

中流砥柱屹然高(중류지주흘연고)-중류의 흐름에 기둥으로 버텨 우뚝 높았네.

황하의 물을 맑히려 한 마니주로, 이 시대의 버팀목으로 탁류의 중앙에서 버텨 왔음을 높이 인정하고 있다.


★무제 無題

愁來厭夜靜(수래염야정)-시름으로 하여금 고요한 밤이 싫고,   

酒盡怯寒生(주진겁한생)-술도 다 마셔 추울까 겁이 난다. 

千里懷人急(천리회인급)-천리 밖 그 사람이 하도 그리워,    

心隨未到情(심수미도정)-마음은 그 곳으로 달려가 서성거린다. 

 

★무제 無題

中歲知空劫(중세지공겁)-중년에 만사 헛것임을 알아

依山別置家(의산별치가)-산을 기대어 외딴 집 얽었다.

經臘題殘雪(경랍제잔설)-섣달 지나 남은 눈을 읊조리고

迎春論百花(영춘론백화)-봄 맞아 온갖 꽃을 맞는다.

借來十石少(차래십석소)-변함없는 돌이사 열 개 빌려 와도 많지 않지만

除去一雲多(제거일운다)-무상한 구름은 하나가 지나도 적지 않구나.

將心半化鶴(장심반화학)-마음은 거의 학이 되었는데

此外又婆娑(차외우파사)-이 밖에 모든 것 아무 소용 없어라.


중년을 40세를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면, 기미독립운동 거사가 만해의 만 40세 때 일어난 일로 보인다. 만사가 헛것임을 몸소 느껴 안 것은 거사의 실패로 수감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온 그 과정에서 얻어진 허탈감 때문이라고 보아진다. 그렇게 집요하고 굳은 의지로 민족 광복을 찾아오고자 분골쇄신 동분서주해 왔지만, 수포로 돌아간 이후 누구보다 큰 허탈감과 절망감에 빠진 만해였다고 한다면,


★무제 無題

此地雁群少(차지안군소)-이곳엔 기러기도 적어

鄕音夜夜稀(향음야야희)-밤마다 기다려도 고향 소식 드물다.

空林月影寂(공림월영적)-빈 숲에 달그림자 적적하고

寒戌角聲飛(한술각성비)-찬 수루엔 피리소리 나르네.

寒柳思春酒(한류사춘주)-싸늘한 버들가지 봄술을 생각하고

殘砧悲舊衣(잔침비구의)-자지러지는 다듬이 소리 낡은 옷에 서러워.

歲色落萍水(세색락평수)-한 해 빛이 부평초 떨어져 나간 물 같은데

浮生半翠微(부생반취미)-뜨네기 삶은 이미 반 중턱에 닿았네.


기러기 소리에 고향 소식 부쳐 온다는 말도 있지만, 그러한 기다림마저도 별무 소용인 변방 수루에 불려 오는 피리소리를 듣는 나그네의 시름은 어느덧 버들 푸른 봄날의 시주(詩酒)가 어우러진 취흥을 그려 내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낡은 옷 초라한 모습으로 방랑하는 나그네의 시정이 돋보인다.


★방백췌암 訪白萃庵

春日尋幽逕(춘일심유경)-봄날에 그윽한 오솔길 찾아 드니

風光散四林(풍광산사림)-숲 가득 풍광이 펼쳐지네.

窮途高興發(궁도고흥발)-막다른 길에 흥은 일어나

一望極淸眼(일망극청안)-맑은 시정 눈에 어리네.


산을 찾는 사람이 봄을 맞아 흔히 느낄 수 있는 교감의 기쁨과 시흥을 읊고 있다.



★별완호학사 別玩豪學士

萍水蕭蕭不禁別(평수소소부금별)-부평초 같은 인생 이별이 설어워

送君今日又黃花(송군금일우황화)-그대 보내는 오늘 국화 피었네.

依舊驛亭 ? ?在(의구역정 ? ?재)-옛 역사엔 슬픔만 차올라

天涯秋聲自相多(천애추성자상다)-하늘가 가을 소리 내게 몰리네.


이 시는 이별의 슬픔과 국화의 꽃핌, 슬픔과 가을 소리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곧 국화의 꽃피움은 우연히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섭섭한 이별의 의미다.

오래된 역사에 이별의 슬픔이 하늘로 차 오르는 원인으로 하여 하늘 밖에 멈추어 어렸던 가을의 소리가 내게로 쏟아져 내리는 정경이다.


★병감후원 病監後園

談禪人亦俗(담선인역속)-선을 말함은 속된 일이지만

結網我何僧(결망아하승)-인연을 지어 대는 내가 어찌 중이랴.

最憐黃葉落(최련황엽락)-안타까운 일은 낙엽지는 일이지만

繫秋原無繩(계추원무승)-가을을 매어 둘 노끈이 없구나.


3·1거사 후 수감되었을 때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고문에 시달리고 마음도 아파 감옥내의 병실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생각하면 인연을 끊고 조용히 앉아 참선을 하든지 경을 읽든지 하는 것이 스님 노릇인데 독립운동이니 불교유신이니 하며 인연을 끊임없이 맺어가는 것은 본분이 아니라는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만해는 포부가 크고 불의를 보고 앉아 있지 못하는 성품이다. 입산하기 전 약관에 이미 의병으로서 활약했다 하니 만해더러 가만 앉아 참선 수행이나 하라 하면 오히려 격에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현실 참여를 중시해 온 만해에게는 낙엽 지고 세월 가는 것이 눈앞의 안타까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병수 病愁

靑山一白屋(청산일백옥)-푸른 산속 외로운 오막살이

人少病何多(인소병하다)-젊은 몸 어이하여 병은 이리 많은지.

浩愁不可極(호수부가극)-온갖 시름 끝 없는 날

白日生秋花(백일생추화)-가을꽃도 피어나네.

3·1거사 후 피검 투옥되어 옥고를 치른 3년 만에 만기 출옥한 만해의 신심은 적지 않게 초췌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심경을 쓴  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향 思鄕

江國一千里(강국일천리)-물 나라는 일천리 이고

文章三十年(문장삼십년)-문장으로는 삼십 년일세

心長髮已短(심장발이단)-마음만 길고 머리 이미 짧아져

風雪到天邊(풍설도천변)-눈 바람은 벌써 하늘가에 있네. 

고향을 생각한다는 사향(思鄕)시이다.

고향을 생각함은 자신이 객지에 있기 때문이다.


 ★산가효월 山家曉月

山窓睡起雪初下(산창수기설초하)-산 창에 잠 깨니 눈내리기 시작하고

況復千林欲曙時(황부천림욕서시)-때마침 아득한 수풀에도 새벽이 깃드네

漁家野戶皆圖畵(어가야호개도화)-오손도손 마을집 모다 그림인데

疾裡尋詩情亦奇(질리심시정역기)-시정에 병든 마음에야 신바람인 걸.

첫눈 내릴 때쯤의 환희심을 읊고 있다. 찌부듯한 몸과 마음을 일으켜 창문을 열 때 눈이 내려 펼쳐지는 그림 같은 어촌 마을의 오붓한 정경을 읊조리고 있다.

만해는 우선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을 몇 편의 시들에서 알 수 있다. 그런 가난의 태에 얽매이지 않았던 만해는 혹독한 추위에 떨면서도 결코 한마(寒魔)에 굴하는 일 없이 미려한 서정을 시로서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장면과 민족적 불운의 큰 슬픔이 배어 있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산주 山晝  산의 대낮 

群峰蝟集到窓中(군봉위집도창중)-봉우리 창에 모여 그림인양 하고

風雪凄然去歲同(풍설처연거세동)-눈바람은 몰아쳐 지난해인 듯. 

人境寥寥晝氣冷(인경요요주기냉)-인경(人境)이 고요하고 낮 기운 찬 날 

梅花落處三生空(매화락처삼생공)-매화꽃 지는 곳에 三生이 空이 어라. 

 

★선사(禪師)의 설법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설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이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이운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것 보다도 더 아픈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大解脫(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는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설야 雪夜

四山圍獄雪如海(사산위옥설여해)-감옥을 에워싼 사면의 산, 눈은 바다 같고

衾寒如鐵夢如灰(금한여철몽여회)-쇠처럼 싸늘한 이불, 꿈도 재처럼 식었으나

鐵窓猶有鎖不得(철창유유쇄부득)-쇠 철창으로도 오히려 가두지 못하는 것은

夜聞鐘聲何處來(야문종성하처래)-어느 곳에서 오나, 한 밤에 들리는 종 소리.

눈 내리는 밤의 시다. 옥중에서의 겨울, 밖에는 눈이 내려 온 산이 허옇다. 바다처럼 끝이 없는 것이다. 감옥 안의 추위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불은 무쇠처럼 차갑고 추위에 떨려 잠이 올 리가 없다. 그러니 꿈도 식은 재처럼 싸늘해졌다. 이렇듯 철저히 폐쇄된 공간에 무서운 자물쇠로도 잠글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종소리인 것이다. 종소리는 한밤 잠도 못 이루는 이 감옥 안을 찾아 준다. 이 가둘 수 없다(鎖不得)는 한마디가 감옥 안의 어느 누구에게나 희망을 주는 공통의 언어이면서 선사에게는 나에게는 저 종소리와 같은 자유의 소리가 있다는 은연의 고백인 듯도 하다.


 

★설효 雪曉

曉色通板屋(효색통판옥)-새벽빛이 판잣집에 들어오니

忽忽不可遊(홀홀부가유)-황홀해 어쩔 길 없네.

層郭孤雲去(층곽고운거)-층층 성곽 위엔 외로운 구름 가고

亂峰殘月收(난봉잔월수)-아찔한 봉우리는 달을 품는다.

寒情키玉樹(한정키옥수)-차가운 정경은 구슬같이 단장한 나무를 싸돌고

新夢過滄洲(신몽과창주)-싱그러운 꿈결에 신선마을 지나네.

風起鍾聲急(풍기종성급)-바람 일어 급해진 종소리에

乾坤歷歷浮(건곤역력부)-하늘과 땅이 역역하게 떠 있네.


빈부에 사로잡힌 속물은 진정한 시를 쓸 수 없다. 마음이 가난에 묶여 있지 않았으므로 만해의 새벽은 황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암절벽 위에 달이 걸려 넘고 구름 떠돌고, 눈 온 뒤의 새벽 경치에 만해는 신선마을을 그려 내었다.


★설후만음  雪後漫吟

幽人寂寂每縱觀(유인적적매종관)-가만히 있던 이도 적적하면 들구경을 나가니 

眼欲靑時意不輕(안욕청시의불경)-푸른 들판 보고픈 뜻을 가볍게 볼 것이 아닐세. 

大雪初晴塵世遠(대설초청진세원)-큰 눈이 오고 나면 티끌세상 사라질까 

萬山欲暮壯心生(만산욕모장심생)-모든 산이 저물려하니 장한 마음이 일어나네 

經歲漁樵皆入夢(경세어초개입몽)-지난 세월 고기 잡고 나무 하던 시절 꿈에 보이고 

忍冬梅竹亦關情(인동매죽역관정)-겨울을 견디는 매죽 또한 마음에 끌리는데 

萬古英雄一評後(만고영웅일평후)-오랜 역사의 영웅들을 훑어본 뒤에

更聽四海動春聲(경청사해동춘성)-세계에서 일어나는 봄소식을 듣는다.  


봄눈이 펑펑 쏟아진 날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봄의 마지막에 함빡 덮어 오는 눈 천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먼지 묻은 세속의 모습을 다 덮어 버린 백색의 맑고 깨끗한 자연에 몇 송이 매화꽃이 벌고 대숲이 봄의 푸른 소리를 일으킬 때 시인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기쁨에 설레이고 있다.


★술회 述懷

心如疎屋不關扉(심여소옥부관비)-마음이 빗장 없는 집과 같아서

萬事曾無入微妙(만사증무입미묘)-미묘한 무엇 하나 없어라.

千里今宵無一夢(천리금소무일몽)-천리에 한 오라기 꿈도 없는 밤

月明秋樹夜紛飛(월명추수야분비)-밝은 달에 가을잎만 우수수 지네.


허랑한 가을의 심경을 그린 시다.

대도를 성취하지 못한 허탈감이 감도는 분위기이다. 다만 ‘한 오라기 꿈도 없는 밤’에서 거추장스런 모든 것에서 깨끗이 떠나 있는 경지, 거기에 가을잎만 무심코 떨어지는 관조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심우장

잃은소 없건만은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씨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


★심우장

소 찾기 몇해던가 풀길이 어지럽구야

북악산 기슭 않고 해와 달로 감돈다네

이 마음 가지 잖으매 정녕코 만나오리.


★심우장

찾을 마음 숨은 마음 서로 숨박꼭질 할제

곧 아래 흐르는 물 돌길을 뚫고 넘네

말없이 웃어내거든 소잡은줄 아옵서라.


 ★안해주 安海州

萬斛熱血十斗膽(만곡열혈십두담)-만 가마의 뜨거운 피와 한 섬의 담력으로

? 盡一劍霜有韜(?진일검상유도)-한 칼을 달궈 내니 서릿발이 날렸구나

霹靂忽破夜寂寞(벽력홀파야적막)-청천의 벽력이 밤의 적막을 격파하니

鐵花亂飛秋色高(철화난비추색고)-무쇠 꽃 어지러이 날려 가을빛 드높다.

안중근 선생의 의거 소식을 듣고 지은 것이고, 


★알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야행 野行

匹馬蕭蕭渡夕陽(필마소소도석양)-쓸쓸히 말 몰아 석양을 지나면

江堤楊柳變新黃(강제양류변신황)-강언덕 버드나무 샛노랗게 물들었다.

回頭不見關山路(회두부견관산로)-머리 돌려도 고국길 안 보이고

萬里秋風憶故鄕(만리추풍억고향)-만 리라 가을 바람 고향 생각뿐.



★야행 野行

尋趣偶過古渡頭(심취우과고도두)-우연히 만나 옛 나루터 지나니

盈盈一水小魚遊(영영일수소어유)-찰랑찰랑 물 속에 어린 고기 놀고

汀雲已逐西風去(정운이축서풍거)-구름은 서풍 쫓아 떠나는데

獨立斜陽見素秋(독립사양견소추)-석양에 홀로 서서 가을을 본다.


가을의 망향시들이다. 샛노랗게 물든 버드나무가 망향의 정을 부추기고 앞뒤를 보아도 고향길이 보이지 않는 향수를 그리고 있다. 물에 노니는 어린 고기를 보면 옛 생각 더욱 뭉클할 것이고 바람에 몰려가는 구름처럼 자유롭게 귀국길에 오르고 싶은 심정을 담고 있다.


 ★약사암도중 藥師庵途中

十里猶堪半日行(십리유감반일행)-십리에서 오히려 반나절의 걸음 견뎌 내니

白雲有路何幽長(백운유로하유장)-흰 구름에 길이 있어 어찌 이리 먼가

緣溪轉入水窮處(연계전입수궁처)-시내 따라 점점 물길이 끊겼으니

深樹無花山自香(심수무화산자향)-깊은 나무 꽃 없이 산은 절로 향기로워.


약사암 가는 길에 지은 시이다.

십 리의 길은 평지로서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구름에 길이 있으니 얼마나 깊은 산골이란 말인가. 그러기에 시내 따라 걷다 보니 물의 근원도 끊긴 곳이다. 숲에 꽃이 없어도 산 자체가 향기롭다.


★양진암 養眞庵

深深別有地(심심별유지)-깊디깊은 별유천지

寂寂若無家(적적약무가)-고요하여 집도 없는 듯.

花落人如夢(화락인여몽)-꽃 지는 것이 사람의 꿈과 같아

古鍾白日斜(고종백일사)-오래된 종에 석양이 기우네.


선경의 모습이다. 고요 속에 유(有)와 무(無)가 융화 되어 있는 모양이다. 꽃 지는 실상(實相)과 꿈의 가상(假相)이 더불어 놀고 있다.


★어적 漁笛

孤帆風烟一竹秋(고범풍연일죽추)-외로운 돛배에 안개 낀 가을

數聲暗逐荻花流(수성암축적화류)-은근한 노랫소리 갈대꽃 따라 흐르네.

晩江落照隔紅樹(만강락조격홍수)-단풍 너머 강물엔 해가 기울어

半世知音問白鷗(반세지음문백구)-반평생 내 노래는 백구가 알리.

韻絶何堪遯世夢(운절하감둔세몽)-기막힌 가락에 둔세의 꿈 못 버리고

曲終虛負斷腸愁(곡종허부단장수)-노래 끝나도 애끊는 시름 견디지 못하네.

飄掩律呂撲人冷(표엄률여박인냉)-떠도는 그 가락 내 가슴에 서늘하여

滿地蕭蕭散不收(만지소소산부수)-천지에 차 오른 쓸쓸함 거둘 길 없네.


숨어 사는 사람의 가을 정취를 읊고 있다. 안개 낀 가을 강을 외로운 돛배를 타고 지나간다. 갈대꽃 갈색 흔들림에 은근히 노래를 섞어 가는 재미는 혼자만의 것이다. 단풍과 낙일을 바라보며 백구를 벗하는, 자연과의 교감이 한가롭게 자유스럽다. 지음의 백구를 얻기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애끊는 시름을 주체하지 못하는 대목이나 천지에 차 오른 쓸쓸함을 다 거두지 못해 하는 심사는 아직 세속적 인연의 미련이 다 맑혀지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장면이라 할 것이다.


★약사암도중 藥師庵途中

十里猶堪半日行(십리유감반일행)-십리에서 오히려 반나절의 걸음 견뎌 내니

白雲有路何幽長(백운유로하유장)-흰 구름에 길이 있어 어찌 이리 먼가

緣溪轉入水窮處(연계전입수궁처)-시내 따라 점점 물길이 끊겼으니

深樹無花山自香(심수무화산자향)-깊은 나무 꽃 없이 산은 절로 향기로워.


약사암 가는 길에 지은 시이다.

십 리의 길은 평지로서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구름에 길이 있으니 얼마나 깊은 산골이란 말인가. 그러기에 시내 따라 걷다 보니 물의 근원도 끊긴 곳이다. 숲에 꽃이 없어도 산 자체가 향기롭다.


★양진암 養眞庵

深深別有地(심심별유지)-깊디깊은 별유천지

寂寂若無家(적적약무가)-고요하여 집도 없는 듯.

花落人如夢(화락인여몽)-꽃 지는 것이 사람의 꿈과 같아

古鍾白日斜(고종백일사)-오래된 종에 석양이 기우네.


선경의 모습이다. 고요 속에 유(有)와 무(無)가 융화 되어 있는 모양이다. 꽃 지는 실상(實相)과 꿈의 가상(假相)이 더불어 놀고 있다.


★어적 漁笛

孤帆風烟一竹秋(고범풍연일죽추)-외로운 돛배에 안개 낀 가을

數聲暗逐荻花流(수성암축적화류)-은근한 노랫소리 갈대꽃 따라 흐르네.

晩江落照隔紅樹(만강락조격홍수)-단풍 너머 강물엔 해가 기울어

半世知音問白鷗(반세지음문백구)-반평생 내 노래는 백구가 알리.

韻絶何堪遯世夢(운절하감둔세몽)-기막힌 가락에 둔세의 꿈 못 버리고

曲終虛負斷腸愁(곡종허부단장수)-노래 끝나도 애끊는 시름 견디지 못하네.

飄掩律呂撲人冷(표엄률여박인냉)-떠도는 그 가락 내 가슴에 서늘하여

滿地蕭蕭散不收(만지소소산부수)-천지에 차 오른 쓸쓸함 거둘 길 없네.


숨어 사는 사람의 가을 정취를 읊고 있다. 안개 낀 가을 강을 외로운 돛배를 타고 지나간다. 갈대꽃 갈색 흔들림에 은근히 노래를 섞어 가는 재미는 혼자만의 것이다. 단풍과 낙일을 바라보며 백구를 벗하는, 자연과의 교감이 한가롭게 자유스럽다. 지음의 백구를 얻기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애끊는 시름을 주체하지 못하는 대목이나 천지에 차 오른 쓸쓸함을 다 거두지 못해 하는 심사는 아직 세속적 인연의 미련이 다 맑혀지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장면이라 할 것이다.


★여금봉백야? 與錦峰伯夜

詩酒相逢天一方(시주상봉천일방)-시와 술이 하늘 한 모퉁이에 만나

蕭蕭夜色思何長(소소야색사하장)-소슬한 밤 모습에 생각은 길다.

黃花明月若無夢(황화명월약무몽)-국화와 밝은 달은 꿈도 없는 듯

古寺荒秋亦故鄕(고사황추역고향)-옛 절 거친 가을이 바로 고향일세.


만해처럼 생각이 깊고 깊은 사람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 그 기개는 매우 무겁고 두터워 예사 사람은 판단하기 어렵고, 더구나 따를 사람 별로 없었으리라. 이러한 연고로 만해는 자연 술을 벗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외롭고 쓸쓸한 심회가 감돌 때면 모름지기 하늘 한 모퉁이에 스스로 버려진 자각증상을 나타낼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이러한 가을밤이면 향기롭게 피어오른 황금국화도 밝은 달도 담담하게만 보였을 법하다. 이러한 가을밤 옛 절의 한 점 자리에 스스로를 앉히고 마음의 고향을 살펴보았으리라 판단된다. 뜻이 통하는 참선 벗과 함께.


★영산포주중 榮山浦舟中

漁笛一江月(어적일강월)-어부의 피리소리, 강과 달이 하나 되고

酒燈兩岸秋(주등양안추)-주막집 등불, 두 언덕 가을빛에 어리네.

孤帆天似水(고범천사수)-돛배는 외로워 하늘도 물 같은데

人逐荻花流(인축적화류)-사람따라 갈꽃 따라 흘러만 가네. 


고요한 물결, 강물 위에 가을이 오면 뭍에서 느끼는 정취와는 별다른 느낌이 있을 것이다. 어부의 피리소리로 강과 달을 일여(一如)의 경지에 들게 하고 그 일여의 경지에서 다시 다(多)의 경계로 풀어 내는 솜씨는 감명 깊다 할 것이다. 강물의 두 언덕에 끝없이 어리어 있는 가을빛 그것이 주막집 등불에 연이어 있다는 표현은 사뭇 재미있다고 본다. 돛배의 하나됨이 하늘과 물을 일치시키고 다시 거기에서 막힘 없이 주변 경관을 살펴 관조의 세계에 드는 재미는 대단하다 할 것이다.


★옥중감회 獄中感懷

一念但覺淨無塵(일념단각정무진)-한 생각에 다만 티끌 없는 청정함 깨달으니

鐵窓明月自生新(철창명월자생신)-쇠창살에도 밝은 달은 저절로 새롭구나

憂樂本空唯心在(우락본공유심재)-근심 즐거움 본래 공한것, 오직 마음만 있어

釋迦原來尋常人(석가원래심상인)-석가모니도 원래가 보통 사람이었어.


옥중에서 느끼는 감회라 하였으니, 옥중생활을 쓰려 한 것은 아니다. 철창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옥중작임을 알 수 없다. 언제 어디에 있던 선사임이 분명하다. 유구일념 한 생각도 항시 청정하여 때가 없고 먼지가 없는 마음이요 움직임이다. 비록 철창 안이기는 하지만 밝은 달은 언제 어디서나 밝은 것이 아닌가. 저것이 역시 나의 마음이라는 은유도 함축되어 있다.


★옥중음 獄中吟(옥중에서 읊는다)

농山鸚鵡能言語(농산앵무능언어)-농산의 앵무새는 언변도 좋네 그려

愧我不及彼鳥多(괴아부급피조다)-내 그 새에 못 미치는 걸 많이 부끄러워했지

雄辯銀兮沈默金(웅변은혜침묵김)-웅변은 은이라지만 침묵은 금이다

此金買盡自由花(차김매진자유화)-이 금이라야 자유의 꽃 다 살 수 있네.


‘농산’은 중국 섬서성 농현 서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농산의 앵무새’가 어떤 고사에 나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하는 말을 흉내 잘 내기로 이름난 새였던 모양이다. 만해가 과거에는 그 새의 언변에 못 미치는 것을 많이 부끄러워했지만 옥에 갇혀 침묵이 금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고는 자경록을 쓰듯이 이 시를 쓴 것이라고 생각된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였으니 일제가 만해를 회유·포섭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 것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곳에서 침묵을 지켜야 종국에는 자유의 꽃을 몽땅 사게 될 것이라고 자신을 경계했던 것이다. 옥중에서 쓴 한시였으니 옥리의 눈에 띄어 고초를 겪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만해는 계속해서 시를 쓴다.



★완월 玩月

空山多月色(공산다월색)-빈 산에 달빛이 흘러 넘치고

孤往極淸遊(고왕극청유)-홀로 거니며 마음껏 노니는 이밤

情緖爲誰遠(정서위수원)-누구에 멀리 달려가는 마음인가

夜深杳不收(야심묘불수)-밤은 깊어 가는데 정을 걷잡을수 없네


★우고인매제하부작오고여유호기심시? 

  又古人梅題下不作五古余有好奇心試?

梅花何處在(매화하처재)-매화꽃 있는 곳이 어디 이던가

雪裡多江村(설리다강촌)-눈 덮인 강촌일세 그려.

今生寒氷骨(금생한빙골)-이생에 얼음 같은 풍골

前身白玉魂(전신백옥혼)-전생엔 백옥의 넋 아니었을까.

形容晝亦奇(형용주역기)-그 모습 낮에도 기이하고

精神夜不昏(정신야부혼)-밤이라 그 정신 밝기만 하네.

長風散鐵笛(장풍산철적)-바람은 피리소리 멀리 흐트리고

暖日入禪園(난일입선원)-따스한 해는 선방에 드네.

三春詩句冷(삼춘시구냉)-봄 석 달 시구는 차갑고

遙夜酒盃溫(요야주배온)-밤새워 다사로운 술잔 비우네.

白何帶夜月(백하대야월)-하얀 그 모습 달빛을 데불고

紅堪對朝暾(홍감대조돈)-붉은 자태 아침 햇살 보는 듯.

幽人抱孤賞(유인포고상)-숨어 살아 외로이 칭찬하노니

耐寒不掩門(내한부엄문)-차다고 너를 두고 문을 닫으랴.

江南事蒼黃(강남사창황)-강남의 일 뒤숭숭하다고

莫向梅友言(막향매우언)-매화에겐 함부로 말하지 말라.

人間知己少(인간지기소)-인간사에 지기는 흔치 않은 것

相對倒深尊(상대도심존)-너를 바라 깊이 취하리. 


눈 속의 얼음이 백옥으로 변신할 수 있으므로 모습은 기이하고 정신은 밝기만 할 뿐일 것이다. 이러한 변신의 인연 고리로 하여, 먼 피리소리와 따스한 햇살, 차가운 시구와 다사로운 술잔의 의미가 제대로 제자리 지킴을 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흰빛은 달빛, 곧 밤의 정화(精華)가 되고, 붉은 빛은 아침 햇살, 곧 하루를 밝게 열어 가는 시발의 증표(證表)로 역할 지움으로 해서 음양을 앞서 이끌어 가는 없지 못할 조화(調和)의 화신이라 할 수 있을 법하다 하겠다. 따라서 숨어 사는 자에겐 모자랄 것 없는 벗이요 반려자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하매 날이 차다고 하여 문닫고 홀로 돌아설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완벽한 군자의 풍모(風貌)를 갖춘 벗, 어디에서도 다시 찾지 못할 반려자, 매화에게 뒤숭숭한 속세의 번잡사를 말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시인으로선 마땅히 만류해야 함이 지당한 일로 여겨진다 할 것이다. 이렇게 찾기 어려운 지기, 매화를 만났으니 이제 한껏 더불어 취해도 좋다는 의사 표명을 전개하고 있다.

시인의 고매한 인품을 눈 속에 매화에 의탁하여 결곡하게 표출해 낸 빼어난 작품이라 할 것이다.


★우중독?  雨中獨?

海國多風雨(해국다풍우)-섬나라 비바람 흔해서

高堂五月寒(고당오월한)-높다란 이 집은 오월에도 춥다.

有心萬里客(유심만리객)-목석도 아닌 만리의 나그네

無語對靑巒(무어대청만)-말 잃고 푸른 산만 바라보네. 


★월방중 月方中

萬國皆同觀(만국개동관)-천하 만국이 다 함께 보아

千人各自遊(천인각자유)-일천 사람들 각기 절로 노네

皇皇不可取(황황부가취)-빛나고 빛나 가질 수 없고

? ? 那堪收(? ? 나감수)-아득하고 아득해 거둘 수 없네.


달이라는 한 소재로 그 변화의 추이를 탐색한 이 작품은 선사이면서 시인인 작가의 섬세한 시정을 잘 보여 주었다.


★월욕락 月欲落

松下蒼煙歇(송하창연헐)-소나무 밑 파란 연기 멈추고

鶴邊淸夢遊(학변청몽유)-학의 주변엔 맑은 꿈이 노닌다

山橫鼓角罷(산횡고각파)-산허리에 나팔소리도 멎어

寒色盡情收(한색진정수)-싸늘한 빛이 정을 다해 거둔다.


달이 지려 함(月欲落)이다.

한 밤의 아름다운 달 놀이도 이제는 마감해야 한다. 숲 속의 신비가 서서히 사라져 가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아스라했던 숲의 정경이 새벽이라는 밝음 앞에 옷을 벗어야 한다. 소나무 아래 파란 연기 멈춘다(松下蒼煙歇) 함이 이 새벽의 은은함이 멎어버림을 말한다. 파란 연기 또는 파란 아지랑이는 넘어가는 달빛에 반사되는 다사롭고 포근한 한 폭의 비단이다. 이 따사로움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월욕생 月欲生

衆星方奪照(중성방탈조)-뭇 별이 막 빛을 빼앗기니

百鬼皆停遊(백귀개정유)-온갖 귀신도 놀이를 멈추다

夜色漸墜地(야색점추지)-밤 색깔 점점 땅에 떨어져

千林各自收(천림각자수)-모든 숲은 제각기 거둬 들이네.


달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그 변화의 시간대에 따라 읊은 연작시이다.


★월초생 月初生

蒼岡白玉出(창강백옥출)-검푸른 산에 흰 옥돌이 솟고

碧澗黃金遊(벽간황김유)-파란 시내엔 황금이 노닌다

山家貧莫恨(산가빈막한)-산집이여 가난을 한탄 말라

天寶不勝收(천보부승수)-하늘 보배를 다 거두지 못해.


이제는 달이 뜨는(月初生) 차례이다.

푸른 뫼에 흰 옥돌이 돋는다. 옥돌의 쟁반이다. 검정빛으로 상징되는 대지가 홀연 흰빛으로 변한다. 시어에서는 푸르다 했지만 기실은 검은 산이다. 이 검정과 백색의 순간적 변화 이것이 바로 어둠과 밝음의 순간적 뒤바뀜이자 위에서 말했던 귀신이 숨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냇물은 갑자기 반짝거린다. 별안간 황금의 금물결이 되었다. 여기서 잠시 이 시에서의 색깔의 조화를 감상해야 한다. 검푸른 산과 흰 옥돌, 파란 시내와 누런 황금의 맞물림이다. 창(蒼)과 백(白), 벽(碧)과 황(黃)이 위아래로 대칭되었다.


★일광남호 日光南湖

神?山中湖水開(신?산중호수개)-신타산중에 호수가 열려

山光水色共徘徊(산광수색공배회)-산 모습 물빛이 함께 맴도네.

十數小船一兩笛(십수소선일양적)-여러척의 작은 배에 몇 가닥 피리소리

夕陽唱倒漁歌來(석양창도어가래)-석양 기울면서 뱃노래 돌아오네. 


산과 물이 어우러져 펼친 그림 속에 몇 척의 어선과 피리소리가 살아 들어 정화(精華)를 이루고 있다.


★자경귀오세암증박한영 自京歸五歲庵贈朴漢永

一天明月君何在(일천명월군하재)-하늘 가득 달 밝은데 그대 어디 계신지

滿地丹楓我獨來(만지단풍아독래)-온 세상 단풍에 묻혀 홀로 왔어요.

明月丹楓共相忘(명월단풍공상망)-밝은 달 단풍은 함께 잊어도

唯有我心共徘徊(유유아심공배회)-내 마음 오직 그대 함께 헤매오. 

박한영 스님은 만해 스님보다는 9살 위인 분으로 만해가 그 학문과 덕행을 가장 존경해 모시던 분이다. 한일합병 다음해인 1911년에 일본은 그들의 국교인 불교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 불교를 합병하려고까지 했으나, 박한영 스님을 최고 대표로 우리측 대표단 한용운, 석진응, 석금봉 등에게 제지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박한영 스님의 문하에서 한동안씩 배운 후학으로는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신석정(辛夕汀)과 서정주(徐廷柱) 등이 있으며, 일제치하에서 이분이 최장기의 이 나라 불교 대표자였으며, 또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동대문 밖 안암동에 조선불교중앙강원을 설립하여 많은 불교학자들을 양성해 내기도 했다.

이처럼 학문이 높고 덕행이 깊은 분을 만해는 존경하며 두터운 교분을 이어 왔다. 가을 설악산의 단풍은 그 깊고 아름다움이 말과 글로서 그려내기 어렵다. 더구나 내설악의 깊은 골짝 골짝들에 깊이 출렁이는 단풍의 깊은 바다 속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오세암의 기암절벽의 빼어난 형상들은 바로 부처님 세계의 진경이라 할 만하리라. 그런 곳의 가을 풍취에 묻혀서 그것과 달을 함께 잊을 수는 있어도 박한영 스님을 잊지 못해 하는 만해의 단풍 바다 속 깊이 빠진 가을의 정를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자민 自悶 번민

枕上夢何苦(침상몽하고)-잠들면 잠든 대로 꿈은 괴롭고  

月中思亦長(월중사역장)-깨면 달빛 속에 끝없는 생각. 

一身受二敵(일신수이적)-한 몸으로 이 두 적(敵) 어이 견디랴.   

朝來鬢髮蒼(조래빈발창)-아침 되니 젊던 수염 백발 되었네. 

 

★정부원 征婦怨

妾本無愁郞有愁(첩본무수랑유수)-첩은 원래 시름 없고, 낭군은 수심 있기에

年年無日不三秋(연년무일부삼추)-해마다 하루가 3년 같지 않은 날 없어서

紅顔憔悴亦何傷(홍안초췌역하상)-혈색좋은 얼굴 여위어도 무엇이 마음 상하랴만

只恐阿郞又白頭(지공아랑우백두)-다만 낭군께서 흰머리 되어 감이 두렵기만 하오

昨夜江南採蓮去(작야강남채련거)-지난밤엔 강남으로 연꽃 캐러 갔다가

淚水一夜添江流(루수일야첨강류)-밤새흘린 눈물을 흐르는 강물에 보태 놓았소

雲乎無雁水無魚(운호무안수무어)-구름에는 기러기 없고 물엔 고기도 없으니

雲水水雲共不看(운수수운공부간)-구름과 물, 물과 구름을 다 바라보지도 않소

心如落花謝春風(심여락화사춘풍)-마음은 지는 꽃이 봄바람을 여의고 가듯 하고

夢隨飛月渡玉關(몽수비월도옥관)-꿈은 달을 따라 날아 옥문관(玉門關)을 건너네

雙手慇懃敬天祝(쌍수은근경천축)-두 손 모아 은근히 하늘 받들어 축원함은

郎與春色一馬還(낭여춘색일마환)-낭군이 봄빛과 함께 말 타고 오기 바람인데

阿郞不到春已暮(아랑부도춘이모)-낭군은 오지 않고 봄은 이미 저물었으니

風雨無數打花林(풍우무수타화림)-비바람 셀 수 없이 꽃 숲을 휘저 놓네

妾愁不必問多少(첩수부필문다소)-첩의 시름 얼마나 되나 물을 필요 없으니

春江夜湖不言深(춘강야호부언심)-봄의 강물 밤 호수도 깊단 말 못하오

一層有心一層愁(일층유심일층수)-마음 한 층 깊을수록 시름도 한 층 높으니

賣花賣月學無心(매화매월학무심)-꽃도 팔고 달도 팔아 무심을 배우리라.


출정 나간 남편에 대한 아내의 원망이다. 여인의 심정을 이렇듯 여실히 표현하는 만해 스님은 바로 승속의 간격이 없는 인간의 본연 그대로임을 알게 한다.


★중양 〈重陽〉

九月九日百潭寺(구월구일백담사)-구월 초아흐래 중양절의 백담사

萬樹歸根病離身(만수귀근병리신)-온갓 나뭇잎이 떨어지니 병도 내 몸 떠나

閒雲不定孰非客(한운부정숙비객)-한가한 구름 정처 없이 누구나 나그네 아니며

黃花已發我何人(황화이발아하인)-누런 국화 꽃 이미 피었으니 나는 또 누구

溪磵水落晴有玉(계간수락청유옥)-시내에는 물이 잦아 옥돌이 드러나고

鴻雁秋高逈無塵(홍안추고형무진)-기러기 가을 하늘 높아 아득히 먼지 없다

午來更起蒲團上(오래갱기포단상)-낮 되자 다시 부들 방석 위로 일어나니

千峰入戶碧色?(천봉입호벽색?)-일천 봉우리 방에 들어 푸른 빛으로 솟네.

9월 9일 날 백담사에서 지은 시이다. 가을도 깊은 산사이다. 봄에 피었던 잎은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간다. 내 몸을 괴롭히는 병도 지는 잎을 따라 나의 몸에서 떠나고 있다. 한가함이란 정지되어 있는 것일 터인데, 떠가는 구름이 왜 한가로운 것인가. 이 정처 없음이란 어디에도 매임이 없음을 말하기 때문에 한가함으로 되비치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일정한 곳이 없다 함은 바로 나그네의 신세이니, 이런 처지에서 누구인들 나그네가 아닌가.

지난 해 피었던 국화가 또 피었으니 나는 누구인가. 지난해의 나라고 해야 하나 새로운 나라고 해야 하나. 국화는 분명히 작년의 국화가 아니니 나 또한 작년의 내가 아니라 해야 하나, 이런 내가 누구란 말인가.


가을이 되면 시냇물은 줄어들고, 물이 줄어들면 바위는 드러난다. 이 바위가 옥돌이다. 바로 개인(晴) 돌이다. 돌에게도 흐리고 개임이 있는 것이다. 물 위로 드러난 돌은 물 밑에 가렸을 때의 흐림이 아니다. 기러기는 가을의 전령이다. 기러기 높이 날면 그 높이만큼이나 가을도 높다. 그 높은 가을의 하늘은 먼지도 없이 멀리 느낀다. 시내는 깊을 대로 깊어지고 가을 하늘은 높을 대로 높다. 이 전후의 대구에서 물 잦아지고(水落) 가을 높아지다(秋高)는 상하의 공간을 될 수 있는 대로 더 멀리 벌려 놓은 공간의 확대이니 여기에서 작시자의 트인 시선을 이해하게 한다.선정의 여가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면 사면의 산빛이 방안을 뚫고 들어옴을 보게 된다. 방안엔 뾰쭉 뾰쭉 솟은 봉우리의 숲이다. 백담사를 둘러싸고 있는 뭇 산이 다시 방안으로 모여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즉사 卽事(1)

山下日? ?(산하일? ?)-산 밑에는 햇빛 쨍쨍

山上雪紛紛(산상설분분)-산 위에는 눈발이 날리고

陰陽各自妙(음양각자묘)-음양의 오묘 함은 각기 제멋대론데

詩人空斷魂(시인공단혼)-시인만 공연히 넋을 태우네.



★즉사일  卽事一

一庵何寂寞(일암하적막)-암자에 쌓인 적막 속에

塊坐依欄干(괴좌의란간)-흙무더기처럼 난간에 기대 앉으니

枯葉作聲惡(고엽작성악)-마른 나뭇잎 괴로운 소리를 내고

飢鳥爲影寒(기조위영한)-배 주린 새 그림자는 차갑기만 하다.

歸雲斷古木(귀운단고목)-돌아가던 구름 고목에 걸리고

落日半空山(낙일반공산)-지는 해는 절반이 빈 산에 걸린다.

獨對千峯雪(독대천봉설)-홀로 하 많은 눈 봉우리 대해 앉으니

淑光天地還(숙광천지환)-봄빛은 천지에 돌아오네. 


겨울에 쌓인 눈은 아직 녹지 않았는데 적막과 배주림 속에서 새 봄빛을 예감하고 있는 조용한 대춘의 시다.


★즉사  卽事

北風雁影絶(북풍안영절)-북녘 바람이 기러기 자취를 끊어 버린

白日客愁寒(백일객수한)-한낮에도 나그네 시름이 차갑네,

冷眼觀天地(냉안관천지)-싸늘한 눈길 하늘 땅 바라보니

一雲萬古閒(일운만고한)-한 떨기 구름만 만고한에 두둥실.

자연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따라서 바쁠 것도 태만할 조짐도 아예 없다. 자연의 의지는 넓고 크고 막힘이 없어 여유 있고, 따라서 한 떨기 구름도 한가히 떠 있을 수 있는 것. 다만 인간 생명의 나약상은 겨울의 추위나 시도한 바의 일이 쉽사리 풀리거나 진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그네의 시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국 광복을 위한 시름 아니면 불교 유신을 구상하는 시름일 수도 있을 법하다.


★즉사 卽事

鳥雲散盡孤月樓(조운산진고월루)-먹구름 흩어진 곳 달 혼자 놓이니

遠樹寒光歷歷生(원수한광역력생)-먼 나무에 찬 빛이 역력하네.

空山雁去今無夢(공산안거금무몽)-빈 산에는 기러기도 가고 잠도 오지 않는데

殘雪人歸夜有聲(잔설인귀야유성)-잔설 밟아 밤길 가는 발자국 소리.

紅梅開處禪初合(홍매개처선초합)-홍매 피는 곳에 삼매에 비롯 들어

白雨過時茶半淸(백우과시다반청)-소나기 지날 때 차맛도 맑네.

虛設虎溪亦自笑(허설호계역자소)-담소하다 호계를 지나 버린 일 우스워

停思還憶陶淵明(정사환억도연명)-가만히 도연명을 생각해 보네.


★즉사 卽事

殘雪日光動(잔설일광동)-눈은 자지러져 가고 햇빛 춤을 추어

遠林春意過(원림춘의과)-먼 숲에 봄뜻 스치네.

山屋病初起(산옥병초기)-산집에 병이 떠나고

新情不奈何(신정부내하)-새 움트는 정 어쩔 수 없어라.

봄기운 아지랑이로 피어 오르는 이른 봄. 만해의 병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구상해 왔던 근심 걱정의 마음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마음앓이를 벗어나 희망을 싹틔우는 만해의 즐거운 봄맞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즉사 卽事

朔風吹白日(삭풍취백일)-삭풍 해를 몰아치는 날

獨立對江城(독립대강성)-홀로 강성을 대해 섰다.

孤煙接樹直(고연접수직)-외로운 연기 나무를 더듬어 솟고

輕夕落庭橫(경석낙정횡)-저녁은 사뿐이 뜰을 가로지른다.

千里山客滴(천리산객적)-천 리에 산 모습 스며 내리는데

一方雪意生(일방설의생)-어디에 눈이라도 내릴 듯.

詩思動邊塞(시사동변새)-시정이 변방을 움직이는데

侶鴻過太淸(려홍과태청)-짝지은 기러기 맑은 하늘 지나가네.

겨울 저녁 변방에서 쓴 시이다.

변방은 원래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역사의 경계선, 혈맥의 경계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 있는 강가의 성곽은 그런 이질감의 완연한 표상이 된다 할 것이다. 그런 곳에서 겨울 스산한 저녁을 맞아 우두커니 서서 성곽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쓸쓸하고 고독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위력을 상실한 태양을 북풍이 사정없이 몰아 분다. 이때 만해는 태양을 빛 잃은 조국으로, 북풍을 일제의 표독한 침탈로 연상하고 있었음직하다. 우두커니 강성을 바라보고 선 시인의 심회는 얼마나 착잡하였을까. 나무를 더듬어 오르는 연기는 바로 시인의 고독을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 있으리라. 저녁빛 깔리고 산그림자 젖어 내릴 때 어디선가는 눈이 내릴 듯한 고적감에 젖어 기러기 떼 날아가는 변방의 시심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즉사 卽事 지금 그대로 

紅梅開處禪初合(홍매개처선초합)-홍매(紅梅)꽃이 벌어지니 중은 삼매에 들고

白雨過時茶半淸(백우과시다반청)-소낙비 지나가매 차도 한결 맛이 맑아

虛設虎溪亦自笑(허설호계역자소)-호계(虎溪)까지 전송하고 크게 웃다니!

停思還憶陶淵明(정사환억도연명)-잠시 도연명의 인품 그리어 보네.


★증별 贈別

天下逢未易(천하봉미이)-천하에서 만나기도 쉽지 않을 일인데

獄中別亦奇(옥중별역기)-감옥 안에서의 이별은 역시 기이하다

舊盟猶未冷(구맹유미랭)-옛 맹세 오히려 식기 전에

莫負黃花期(막부황화기)-국화꽃 시기를 저버리지 말자. 

사람살이가 만나고 헤어짐을 제외하면 별로 남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의 작품에는 만나고 헤어짐의 노래가 많은 양을 차지한다. 여기서도 이별에서 주는 시이다. 만남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것도 이 감옥에서 만나다니 기이한 인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또 이별해야 하니 기이한 인연치고는 너무도 기이한 인연이다.


그러나 이별이란 반드시 만남이 전제되는 것인데, 그것도 갖은 고통을 안아야 하는 감옥에서였으니, 다시 만나자는 맹세가 예사로울 수가 없다. 어쩌면 혈맹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기약은 올해가 가기 전 국화꽃 계절이어야 하리라.

 

★차영호화상향적운(次映湖和尙香積韻) 

萬木森凉孤月明(만목삼량고월명)-숲은 썰렁한데 외로운 달빛이

碧雲層雪夜生溟(벽운층설야생명)-구름과 눈 비추니 완연한 바다.

十萬株玉收不得(십만주옥수불득)-십만 그루 그 구슬 하도  고와서

不知是鬼是丹靑(불지시귀시단청)-조화인 줄 모르고 그림인가고.


★청한 淸寒

待月梅何鶴(대월매하학)-달을 기다려 매화는 학인 양 서 있고

依梧人亦鳳(의오인역봉)-오동에 기대니 사람 또한 봉황일세.

通宵寒不盡(통소한불진)-밤새워 추위는 그치지 않고

키屋雪爲峰(키옥설위봉)-눈은 온통 집을 둘러싸 봉우리를 이룩했네.

밤새워 기성을 부려 대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생생한 정서는 매화나무를 학으로 의인화하고 사람을 봉황으로 변신시켰으며, 마을이 온통 눈 봉우리로 이룩된 정경은 바로 청정 희락 그것이리라.


 

★청효 淸曉(맑은 새벽)

高樓獨坐絶群情(고루독좌절군정)-다락에 앉으니  뭇 생각 끊이는데

庭樹寒從曉月生(정수한종효월생)-새벽달 따라 추위가 생겨나...

一堂如水收人氣(일당여수수인기)-물을 끼얹은 듯 인기척 없는 곳

詩思有無和笛聲(시사유무화적성)-어렴풋한 시상 피리에 화답하느니!

 

★추야우 秋夜雨 가을 밤비

床頭禪味澹如水(상두선미담여수)-정(定)에 드니 담담하기 물 같은 심경

吹起香灰夜欲闌(취기향회야욕란)-향불 다시 피어나고 밤도 깊은 듯. 

萬葉梧桐秋雨急(만엽오동추우급)-문득 오동잎 두들기는 가을비 소리 

虛窓殘夢不勝寒(허창잔몽불승한)-으스스 새삼스레 밤이 차구나. 

 

★추효 秋曉

虛室何生白(허실하생백)-빈 방 희끗해지며

星河傾入樓(성하경입루)-은하는 다락에 기울어 든다.

秋風吹舊夢(추풍취구몽)-가을 바람 지난 꿈을 불고

曉月照新愁(효월조신수)-새벽달 새 근심 비춘다.

落木孤燈見(낙목고등견)-벗은 나무 건너 등불 하나 걸렸고

古塘寒水流(고당한수류)-옛 못으로 찬 물길 흐른다.

遙憶未歸客(요억미귀객)-돌아오지 않는 나그네 생각다가

明朝應白頭(명조응백두)-내일 아침이면 머리칼 희어지리.

일본에 잠깐 머물면서 쓴 나그네의 시름을 읊은 시이다. 지난 꿈은 무엇을 상징하는 말일까. 그것은 만해에게 걸맞은 것으로는 민족적 불운, 일제에 침탈당한 유사 이래 없었던 망국적 비극을 상징하는 대목일 것이라고 보아진다. 그래서 그 꿈을 차갑고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리라. 새 근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그것은 조국 광복을 위한 포석과 거사 방법, 시기, 동지 규합을 위한 근심이라 하면 틀렸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차가운 이국의 심정이 가을의 한복판에 동떨어지면서 외로운 등불 아래 옛 못으로 흘러 드는 물길을 바라보며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할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나그네란 무엇일까. 그것은 실현되지 못한, 실현되기 어렵기만 한 조국 광복의 의인화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아직은 늙었다 하기에는 혈기왕성했던 당시의 만해는, 조국 광복을 실현하지도 못하고 헛되게 머리칼만 희어지고 말지는 않을까 하는 우국충절의 근심을 가볍게 가을 정서에 붙여 보내는 장면이라 한다면 걸맞은 판단이라고 사료된다.기미 독립선언 때가 만해의 세륜 40세, 만해가 일본을 방문한 것이 그 몇 해 전, 그러니까 1908년이었다 하니 정확히 독립선언 11년 전이었다.


 

★추회 秋懷

十年報國劒全空(십년보국검전공)-나라 위한 십년 허사가 되고

只許一身在獄中(지허일신재옥중)-겨우 한 몸 옥 속에 갇혔네.

捷使不來?語急(첩사부래?어급)-전승기별 아니 오고 벌레만 저리 울어

數莖白髮又秋風(수경백발우추풍)-몇 오라기 흰 머리칼에 또 가을 바람 부네. 


만해의 옥살이는 우리 전민족의 옥살이이다. 3·1독립만세운동으로 투옥된 만해가 옥중에서 가을 벌레 소리 들으며 모진 고문당할 때 그 아픔은 배달의 아픔 바로 그것이요, 비참하기 비할 데 없는 노릇이었다 할 것이다.


★춘몽 春夢

夢似落花花似夢(몽사락화화사몽)-꿈은 낙화 같고 꽃은 꿈 같은데

人何胡蝶蝶何人(인하호접접하인)-사람은 왜 또 나비 되고 나비 어찌 사람 되나.

蝶花人夢同心事(접화인몽동심사)-나비 꽃 사람 꿈이 마음의 일이니

往訴東君留一春(왕소동군류일춘)-봄의 신 찾아가 이 한 봄 못 가게 하자.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편 속의 나비꿈은 너무나 유명하다. 장자가 어느날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꿈에서 문득 깨어 보니 자기가 장자라, 하여 장자가 나비였는지 나비가 장자였는지 아리송하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난만히 꿈과 나비와 꽃으로 어우러지는 봄의 시정(詩情)은 여유만만하기만 하다.

이토록 좋은 계절의 정취를 오래 붙들어 두고자 봄의 신에게 부탁드리는 심회는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나라의 운기가 창성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었더라면 만해는 시와 더불어 사는 큰 시인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춘주 春晝

따스한 별 등에 지고 유마경을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춘주 春晝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삽살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 친다

어디서 꾸꿍이 소리 산을 넘어 오더라


★침성 砧聲(다듬이 소리)

何處砧聲至(하처침성지)-어디서 나는 다듬이 소리인가

滿獄自生寒(만옥자생한)-감옥 속을 냉기로 가득 채우네

莫道天衣煖(막도천의난)-천자의 옷 따뜻하다 하나 도가 아니다

孰如徹骨寒(숙여철골한)-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것을.


감옥에까지 들려온 다듬이 소리를 소재로 해서 쓴 시이다. ‘천의(天衣)’는 천자(天子)의 옷, 선인(仙人)의 옷, 비천(飛天: 신선이나 선녀)의 옷 중 어느 것을 택해도 무방하겠지만 일제치하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천자의 옷’으로 해석해보았다. 즉, 천자는 천황의 다른 말로 쓴 듯하다. 천의가 제아무리 따뜻하다고 한들 그것은 ‘도’가 아니며, 나는 지금 뼛속까지 냉기를 느끼고 있을 뿐이라며 일제의 침탈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한강 漢 江

行到漢江江水長(행도한강강수장)-한강에 와서 보니 강물은 깊고,

深深無語見秋光(심심무어견추광)-깊은 물결 말 없는데 가을빛 어리네.

野菊不知何處在(야국불지하처재)-모르겠네, 들국화는 어디 피었는지,

西風時有暗傳香(서풍시유암전향)-때로 서풍 타고 향기 풍기네. 


한적 寒寂(추운 적막)

不善耐寒日閉戶(불선내한일폐호)-요즘은 날이 추위 문을 닫고

觀山聽水未能多(관산청수미능다)-산수를 제대로 찾지도 못한다.

雪風埋屋人寂寂(설풍매옥인적적)-눈바람 집을 메워 고요도 고요한데

禪如春酒散梅花(선여춘주산매화)-봄술들며 낙매(落梅)를보는 선미(禪味)에 취한다

 

★향로암야? 香爐庵夜?

南國黃花早未開(남국황화조미개)-남국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江湖薄夢入樓臺(강호박몽입누대)-강호에 노는 꿈이 누대에 머물렀네

雁影山河人似楚(안영산하인사초)-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비추고

無邊秋樹月初來(무변추수월초래)-가이없는 가을나무 사이로 달이뜨네

                                                 만해 친필시


★향로암즉사 香爐庵卽事

僧去秋山逈(승거추산형)-중이 떠나가니 가을 산 멀고

鷺飛野水明(로비야수명)-백로 나는 곳 들물 맑아라.

樹凉一笛散(수량일적산)-나무는 서늘한데 피리소리 흩어지네.

不復夢三淸(부부몽삼청)-신선 사는 곳 꿈꾸어 무엇하리.


하안거를 파하고 만행길에 오른 선승의 가벼운 발걸음과 환희심을 짐작케 하는 시다. 신선이란 즐겁고 안락하며 오래 살기를 바라는 세계라 한다면, 선을 수행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리분별과 이단(二端)의 차별상을 타파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래 산다 일찍 간다 하는 일이라든지 안락하다 고되다 하는 분별심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는 길을 추구하는 것이 선수행이라 할 것이다.


★향로암야금 香爐庵夜唫

南國黃花早未開(남국황화조미개)-남국에도 철 일러 국화 안 피고

江湖薄夢入樓臺(강호박몽입누대)-눈에 선한 누각 그리운 강호여.

雁影山河人似楚(안영산하인사초)-산천에 나는 기러기 사람을 가두고

無邊秋樹月初來(무변추수월초래)-끝없는 가을 숲에 달이 솟는다. 


국화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 강호의 추억에 들은 감회를 기러기 떼 날아와 소란스레 부추기는 장면이다. 때마침 숲 위에 달이 솟아 가을의 꿈을 비추고 있다. 바람과 추억이 얽힌 아름다운 시라 할 것이다.


★호접 蝴蝶

東風事在百花頭(동풍사재백화두)-봄바람에 온갖 꽃 바삐 찾아 다니니

恐是人間蕩子流(공시인간탕자류)-마치 방탕한 인간 같구나.

可憐添做浮生夢(가련첨주부생몽)-가련타, 뜬세상에 헛꿈 더하니

消了當年第幾愁(소료당년제기수)-당년에 몇 번이나 근심을 풀었더냐? 


호접(蝴蝶)에서는 탕아로 타락해 버린 나비인 것이다. 탕아가 된 나비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탕녀들의 무리라 할 것이 아닌가. 이들이 득실거리는 뜬세상의 끊임없는 헛꿈은 부정적이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사회상을 꿈꾸어 온 만해로서는 흔하지 않은 정서 표출이라 할 것이다.이 작품이 성립된 시기는 만해가 3·1거사를 거행하기 이전, 장소는 일본땅이다. 따라서 일본의 비인도적 침략 사항을 탕아에 비유하여 구조화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황매천 黃梅泉

就義從客永報國(취의종객영보국)-의로운 그대 나라 위해 영면했으나

一瞋萬古큖花新(一瞋萬古큖화신)-눈 부릅 떠 억겁 세월 새 꽃으로 피어나리

莫留不盡泉坮恨(막류부진천대한)-황매천 엄청난 한을 다하지 말고 남겨둡시다

大慰苦忠自有人(대위고충자유인)-사람됨을 스스로 괴로워했던 것 크게 위로하고프니.


매천 황현은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한말의 문장가요 역사가이다. 만해는 황현의 엄청난 한을 늘 생각하며 시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다수 문인이 비탄에 잠겨 슬픔과 좌절을 노래하고 있을 때 만해는 흔들리지 않는 자존심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있음을 증명하는 시가 바로 “黃梅泉”이다.


★회음 懷吟

此地群雁少(차지군안소)-이 땅에는 기러기도 없으니

鄕音夜夜稀(향음야야희)-고향 소식 밤마다 드물구나

空林月影寂(공림월영적)-빈 숲에는 달 그림자 고요하고

寒戍角聲飛(한수각성비)-추운 변방에 나팔 소리 날리네

衰柳思春酒(쇠류사춘주)-쇠잔한 버들에도 봄 술 생각나고

殘砧悲舊衣(잔침비구의)-잦아지는 다듬이 해진 옷 서럽다

歲色落萍水(세색낙평수)-한 해 색깔 마름풀처럼 지고 있어

浮生半翠微(부생반취미)-뜬 인생살이 반은 산속이었네.

  

한 해도 저물어 가는 섣달 밤의 회포이다. 그것도 나그네로 지내는 처지에서 느끼는 심회이다. 기러기가 고향의 소식을 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과 북으로 오가는 기러기의 그림자나 울음에서 고향을 연상할 수 있는 계기라도 되겠거늘 이곳은 기러기의 그림자도 보기 드문 곳이다. 그러니 가득 차도 비어 있는 숲이요 거기에 걸려 있는 달 그림자도 적적할 수밖에 없고, 국경을 수비하는 나팔 소리만이 날아들어 온다.


잎도 다 진 버들의 실가지 늘어졌는데, 오히려 지난 봄 그 밑에서 마셨던 다사로운 봄 술이 생각나고, 이웃에서 들려 오는 가냘픈 다듬이 소리에는 이 다 낡은 헌 옷이 서글프기만 한 것이다. 버들과 술, 다듬이와 헌 옷의 함수는 만상의 자연물과 작자의 정서를 교묘히 묶어 주는 시어들이다. 이런 상념 속에 한 해도 저물어가고 있다.

평수(萍水)는 물에 떠도는 마름풀을 말하여 인생살이의 떠돌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한 해의 색깔이 이 마름풀로 지고 있다는 이 시어의 구성은 재미있다. 그것도 마름풀로 지고(落) 있다는 것이다. 세색(歲色)과 평수(萍水)를 이어 주는 낙(落)의 한 글자가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보이듯이 그리고 있다.

 

★효경 曉景

山窓夜已晝(산창야이주)-산창에 날이 새는데

猶臥朗 ?詩(유와랑 ?시)-누운 채 시를 읊는다.

? 然更做夢(? 연갱주몽)-즐거움에 다시 잠이 들어

復上梅花枝(부상매화지)-또 꿈속에 매화를 찾아간다. 


한가로운 시인의 새벽을 읊조리고 있다. 잠에서 깨면 시를 읊고, 그러다가 즐거움에 다시 꿈에 들어 매화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효일 曉日

遠林煙似柳(원림연사류)-먼 숲의 연기 버들인 듯하고

古木雪爲花(고목설위화)-고목 나무에는 눈이 꽃이 되었다

無言句自得(무언구자득)-말 없이 시구 저절로 얻어지니

不奈天機多(부내천기다)-어쩌면 하늘 기틀 많아서인가. 


새벽에 지은 시이다. 숲과 고목을 소재로 했을 뿐 별다른 풍경이 없다. 그저 일상의 시간적 배경이다. 왜 하필 먼 숲인가. 거리의 아득함이 고독의 정적을 느끼게 한다. 새벽이라는 시간이 시선을 불확실하게 하기도 하지만, 새벽 연기에 싸인 숲이기에 더더욱 고즈넉하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당신의 얼굴은 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光明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요.


소리 없음은 침묵인데 여기서는 소리가 침묵이라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님의 노래는 들을 수 있지만, 침묵의 극치인 정밀의 세계에서는 우렛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떠날 때의 임의 얼굴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 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는 바로 볼 수가 없을 만큼 어여쁠 것입니다.

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굴을 나의 눈에 새기겠습니다.

님의 얼굴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무도 야속한 듯하지마는

님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어여쁜 얼굴이 영원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겠습니다.


《님의 침묵》에 있는 시이다.  여기에서 한글로 구사한 시어와 한시로 구사된 시어의 간격을 여실하게 볼 수가 있다. 《님의 침묵》은 언어적 수사이기에 표현이 보다 자유로워 역설적 논리가 자재로우나, 한시는 문자적 제한과 시의 형식적 속박이 억양이나, 굴절 반복 등을 자재로이 하지 못하는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한시에서 함축된 의미의 은근함은 너무 직설적인 언어의 시보다 우수한 점도 있다. 어찌되었건, 만해 선사는 문자적 한시와 언어적 순수시를 구사한 시인으로서 우리 시사(詩史)에서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論介)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回想)한다.


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핀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象徵)이냐.


빠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우지 못한 낙화대(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醉)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밝히운 강 언덕이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은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은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金石)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恨)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그대에‘눈물'의 곡조를 낙인(烙印)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鐘)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가 신에게 참회를 아니 한 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千秋)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출처 : 한마음의 멜로디
글쓴이 : Only Yo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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