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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박경리 옛날의 그 집 박경리

by 3856 2008. 7. 28.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2008, 현대문학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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