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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문학

수필 두 편

by 3856 2008. 9. 4.

빨래터 이야기
  글쓴이 : 조성원 날짜 : 08-07-13 16:54   

 

 우리나라 화가가 그린 작품 중 가장 비싼 값으로 팔린 유화그림은 박수근의 빨래터란 그림이다. 위작이냐 아니냐 말이 많았지만 진품으로 밝혀진 그 그림은  무려 45억이 넘는 금액에 팔렸다. 종전의 최고가 역시 시장의 사람들이라는 박수근의 그림이었다. 미군들에게 당시 주로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벌었던 그는 어느 미국인 수집가가 물감과 캔버스를 제공하자 빨래터란 그림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림을 잘 볼 줄 모르지만  '아기 업은 소녀', '고목과 두 여인' , '빨래터','산', '시장의 여인들' 등 그의 작품을 대하면 서민적이고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삼았음을 단 번에 알 수 있다. 이 대부분의 서민층의 인물상은 흰 무명 치마저고리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의 옷차림이 가장 많고 때때로 엷은 색깔이 등장하는 것이 고작이다. 더욱이 그는 가난과 시골길을 연상시키는 회갈색 암울하고 잘박한 색채를 많이 썼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그림을 대하면 서민의 애환을 자연 상상하게 된다. 죽고 싶다와 살고 싶다가 똑 같이 치열해서 어느 쪽에도 치우칠 수 없는 그런 인간 삶의 모순이 그 안에 무덤덤하게 들어있다.  암울한 시대, 운명처럼 끌어안고 살 악성 종기와도 같은 황량함과 고독 그리고 존재로서의 갈망을 말한다. 허무와 구원이 같이 상존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의외이다. 이를 유사하게 그려낸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은 바로 그가 또 소재였다.

 

 나는 빨래터란 그림에 유독 눈길이 많이 쏠린다.  6명의 여성이 개울에서 옷을 빠는 모습인데, 각각의 여성들은 분홍색, 노란색 그리고 초록색의 옷을 입고 있다. 그림이 평면적이라 언뜻 이집트 벽화를 보는 양 맨송맨송 하지만 그런  단순한 구도와 채색의 질박함이 오히려 잊혀져가는 현실에 제격으로 맞다 싶다. 만약 여인들 표정이  상세하다면 여릿한 채색이나 무던한 느낌은 그 자체가  천박하여 그로 의미가 없고 추억의 상상도 없지 싶다. 난 빨래터가 대대손손 내려온  흔한 일상의 것이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흡족하다. 

 

 

 

 

 

 에로틱하지만 김홍도의 그림에도 빨래터란 그림이 있다. 이는 습관처럼 밴 청결함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금수강산은 늘 맑고 깨끗하였으며 그로 우리 민족은 늘 청결하였으며 또 그렇게 살고자 하였다. 아무리 가난하여 배를 곪아도 옷은 깨끗이 하고 갓은 반듯하였다.  목욕을 즐겨 하였던 로마 시민들이 합리적이고 예방적 자세로서  천년을 넘게 제국을 유지하였듯 우리는 하얀 옷을 즐겨 입으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가꾸어 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단오절이 중요하고 청빈낙도나 선비정신은 본받을 사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빨래터는 여자들의 유일한 희희낙락 장소였다. 마을 사랑방이 남정네들 차지였다면 빨래터는 여인들의 치마 속 곰삭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그런 이야기 터였다. 곳에서 주무르고 비틀고 방망이로 쳐대는 것이 단지 빨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은밀히 소통을 하고 때론 넋두리에  한풀이를 하는 여인들의  불문율과도 같은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곱은 손을 마다않고 한 겨울에도 여인들은 곳을 찾곤 하였다. 우물가에선 속삭이듯 소통하였지만 곳에서는 흘러가는 냇물 소리 따라 자연 왁자지껄하고 대범할 법도 하였다. 그러기에 곳은 소문의 진원지이기도 하였다.

 

 이젠 어디를 가도 빨래터란 곳은 찾기  힘들다. 집집이  모두들 세탁기를 쓴다. 번번이 생각이 드는 것이 세탁기 없던 예전만 훨씬 못하다는 것이다. 그 시절은 박박 문대고 방망이로 쳐대서인지 비록 옷은 금세 헐었지만 말끔하였는데 요즘은 옷은 헤지지 않았지만 빨아도 깔끔하지가 않다. 묵은 때 일수록 그런 질감은 더하다. 한 번은 새 옷을 입고 나갔다가 칠칠치 못하여 옷을 버리고 말았다. 아내 모르게 세탁기를 돌렸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그 시절처럼 빨래판에 옷을 대고 박박 문지르고 헹구었더니 금세 산뜻해졌다. 

 

 

 

 그런데 묘하게 시리 세탁기를 돌릴 때는 세탁 끝나는 시간만이 머릿속에 떠올려졌을 뿐인데 옷을 직접 비벼 빨 때는 국물을 흘렸던 그 아찔한 순간의 기억하며 옷을 건네주는  아내의 모습까지 소상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세탁기는 편리하지만 우리의 정감을 영원히 빼앗아 간 존재인지 모른다.  필시 화가의 그림 속에 담긴 여인들 또한  애환과 서러움을 너절한 빨래와 같이 곱씹으며 깨끗이 빨아 널었을 것이다. 옷을 빨며 생각을 씻고 바람결에 마음을 달래고 푸른 하늘에 자신을 널고 옷을 넌다.  자신을 빨며 자신을 버리며 또한 버린 자신을 다시 줍는다.

 그런 것이 흡사 글과 닮았다. 떠오른 생각들은  빨래하듯 다그치고 주무르고 가두어 말짱해진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렇지만 나는 빨래처럼 말짱한 모습으로 표백되기만을 바라지는 않겠다. 오히려 치우친 삶의 모순으로 얼룩이 채 남아도 무방하며 닳고 닳아 운명처럼 끌어안을 구멍 뻥 뚫린 허무라 하여도 개의치 않겠다.  존재로서의 푸른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린 갈망이면 그저 족할 뿐이다. 다만 군소리 가득 윗물 아랫물 해가며 빨래터 좋은 위치 차지하기에 여념이 없는 그런 추한 꼴은 영원히 사양하리라.  빨래터는 빨래를 하자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갈색의 군무   
 
 글쓴이 : 이언주 날짜 : 08-09-03 09:00           
 
 가로수 잎사귀에 초록빛이 지쳐있다. 눈부시던 햇살은 힘이 빠지고, 바람 끝을 타고 잎들이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어느새 가을이다. 지난여름 열기에 덧난 생채기를 다독이며 아직은 푸른색을 고집하는 젊음에 맞서지 않는다. 바람 한 줄기가 미열을 앓는 계절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지고 있다.
 
 자유로를 벗어나 넓은 들로 나갔다. 습관처럼 다니던 길에서 내려 농로를 따라 둑길까지 닿았다. 제방으로 올라서자 가슴이 탁 트인다. 방죽에는 어린아이 한 키만큼 자란 풀들이 가을걷이 준비가 한창이다. 달맞이꽃은 씨방이 여물어 가고 박주가리가 탱글탱글하다. 굵게 휘감겨진 넌출 아래 늙은 호박 한 덩이가 눌러 앉아있다. 둑을 사이에 두고 들녘에는 곡식이 익고, 천변 습지에는 갈대가 익어간다. 배수장을 지나 철교까지 나가자 ‘국가 하천 곡릉천’이라는 작은 간판이 보인다.

 습지에서는 갈색 바람이 몰려다닌다. 군무를 즐기듯이 유연하게 줄기 사이를 바람이 헤치고 지나간다. 바람꽃이 무수한 새의 날개처럼 팔락인다. 건들바람에 갈대들이 비스듬히 드러눕는다. 그러더니 댓잎 같은 이파리가 다시 바람을 만들어내고 누웠던 갈대들이 일제히 일어난다.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 갈대의 강인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갈 이파리 흔드는 소리가 함성처럼 천변을 누비고 다닌다.

 갈 숲이 서걱거리며 속을 비워내고 있다. 속을 비운다는 것은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긁힌 상처를 참아내고 세상의 거리로부터 마디마다 들어찬 속살을 털어내고 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로 어느 날은 거친 파도소리로, 어떤 날은 고요한 소리로 목을 가다듬는다. 갈대는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지나가도록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바람과 갈대에 몸을 맡기고 서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 본다. 내게 들리는 것이 갈대 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가슴 속에서 마른 갈대 부비는 소리가 난다. 웅웅거리고 울다가 솨아하고 제풀에 잦아들어 바람이 순해진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다의 향기가 날아든다. 

 나도 한 번쯤은 바람을 꿈꾸고 싶다. 일상에서 벗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상상하고,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훨훨 떠나고 싶기도 하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유혹에 흔들리고 싶다. 그러나 바람은 비워있는 곳을 향한 공기의 이동일 뿐, 생각해 보면 내 가슴속에서는 바람이 살고 있었다. 바람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흔들리고 살았다. 한 고비를 너머서면 다른 고비가 가로막고 있고, 큰 마루를 앞에 두고 숨차하다가도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지나온 길은 약간의 오르막일 뿐이었다. 가끔은 밀려가기도 하고 쓸려가기도 하지만, 살면서 어느 한 순간이라도 내가 주인이 아닌 적이 있었던가.

 갈대는 때가 되면 스스로 허리를 꺾는다. 지난 봄 떠났던 철새가 돌아오면 제 몸을 눕혀 자리를 깔아주고 추운 겨울을 날 둥지를 만들어 준다. 가으내 갈대는 바람에 꺾이지 않으려 속을 비우고 산다. 천변 펄 속에 수염뿌리를 내려 물을 정화시키고, 강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보금자리가 된다. 천변 갈대숲에서 모두가 주인이 되게 한다. 갈대가 모든 것을 품으면서 각자 자신의 일을 하며 스스로의 삶을 엮어나간다. 어느 시인이 연약한 갈대밭을 소나무나 참나무 숲처럼 당당히 갈대숲이라 불렀던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가을이 깊어간다. 붉게 타는 저녁노을에 개펄이 물들어 간다. 황금빛 물살을 튕기는 물고기들의 은빛 비늘이 반짝거린다. 산골짜기 작은 샘에서 발원하여 먼 길을 흘러와 바다 가까이 온 하천에 갈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한가로운 왜가리 떼가 고기를 잡고, 때 이른 철새들이 오르내린다. 멀리 마을에 하나 둘 저녁 불빛이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