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소개

장편소설 붉은아침

3856 2008. 6. 11. 20:41

 

장편소설 "붉은아침"을 읽었다.

 

2부의 한 장면을 올린다.

 

 아무튼 영문도 없이 긴장해졌다.
 “난 오늘 유리의 작은 할아버지 신분으로가 아니라 같은 남자로서 자넬 만난 걸세. 그러니 어려워할 것 없이 속심을 털어놓고 얘기해 보자고. 가능할까?”
 “할아버지의 기대에 실망을 끼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분이 자신을 찾은 목적이 분명 유리와 자신의 일 때문이라는 걸 확인하자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십중팔구는 불륜을 중지하고 사랑을 포기하라는 권유일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천장에 가설한 확성기에서 첼로독주의 은은한 멜로디가 가늘게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구석 쪽에 앉은 남녀는 무슨 화제 때문인지 두 사람 다 눈에 눈물이 글썽한 채 울음을 참느라 창밖의 분주한 거리에 눈길을 던져놓고 있었다.
 “자넨 유리에 대한 사랑이 분명 이성간의 사랑이라고 확신하고 있나? 물으나마나한 질문 같지만 한 번 더 심사숙고하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어 그러네. 다시 말하면 자넨 남녀간의 이성애를 남매간의 혈육애로 바꿀 자신이 있나 하는 것일세.”
 갑작스러운 질문에 준호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대답이었다. 이성애와 혈육애는 결코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터널이나 케이블이 없는 통행금지구역이다. 그런데도 그 구역의 통행을 강행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지 않는가.
 사실 인간의 사랑은 혈육애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타의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그래서 강한 예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성애는 자의에 의한 선택이다. 다시 말해 이성애는 협소한 혈육애의 구속과 예속에서 해탈하는 개인의 자유의지의 실현이다.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저는 그 계선을 비법 월경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성애라는 해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더러 저 넘을 수 없는 바다를 건너 혈육애의 해변으로 건너가라고 합니다.”
 “원래부터 있었던 곳이라면 그 곳도 자네의 영역이네. 비법 월경자가 아니지. 자넨 떠나온 곳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네. 자넨 오래전부터 그 땅에서 씨를 뿌리고 살고 있었네. 그렇지 않은가?”
 “그러시다면 할아버님께서는 저와 유리 씨의 관계가 정당화, 합리화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의외의 태도에 준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반문했다.
 “유리한테도 같은 뜻의 말을 해주었네. 불륜의 바다를 건너 연인 사이로 된 게 아니란 뜻이지. 자네들의 만남은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서였네. 그리고 사랑했을 뿐이네. 그게 왜 불륜이 되나? 누군가에게 불륜의 행위가 있었다면 그건 자네들이 책임져야 할 바가 아닐세. 책임질 사람이 따로 있겠지. 하지만 그들에게 그 책임을 모두 지운다는 것도 도리가 아닐세. 그들 역시 그 시대의 피조물이기에 말일세.”
 “할아버지, 저희들의 마음을 그토록 깊이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해가 아니라 느낌일세. 때로는 이치보다 느낌이 더 정확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이치대로만 살자면 힘들겠지요.”
 “힘든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걸세. 자신의 양심을 배신하지 않는 삶만큼 쉽지 않지.”
 “그런데 유리 씨의 할아버지와 저의 할아버지께서 우리의 사랑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효녀인 유리 씨는 할아버지의 의사를 거부할 수 없는 거지요.”
 “나도 형님을 설득해 보았네. 형님께서는 남매사이라고 하는 혈연관계보다는 최덕구의 손자라는 사실이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일세! 형님과 자네 할아버지간의 전쟁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유리나 자넨 그분들이 장악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유생역량이거든. 그런 유생역량을 적에게 제 손으로 들어 바칠 수는 없을 거네. 그리고 효도는 절대적인 복종과 순종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세. 효도는 부모가 낳아준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부모의 능력을 연장시키고 확대해주는 것이기도 하다네. 다시 말하면 효도는 때로는 거역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그 거역은 부모님을 위한 것이라네. 부모가 생명을 주었으면 자식은 그 생명을 스스로 경영해야 하네.”
 “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생과 사의 계선이 너무나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생이 과거의 죽음이며 오늘의 죽음이 비워둔 자리를 메우는 것이라면 죽음은 과거의 생이며 내일의 생의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아닐까요? 생사는 그저 자연의 존재방식일 따름이고요.”
 “그렇지. 비운다는 건 마련해주고 제공해 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네. 자네들의 사랑은 바로 그 비워진 자리가 있기에 그 자리를 메울 수 있는 거지.”
 모든 문제가 명쾌하게 풀린 것 같기도 하고 더 복잡하게 헝클어진 것 같기도 하여 종잡을 수 없었다. 유리 씨와의 사랑을 계속하라는 권고라는 의미는 확실히 느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윤리적, 사회적 명분이 뚜렷하게 제시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념의 대결과도 이어졌다가 또 윤리적 문제와도 충돌했다가 하면서 공식적인 문제풀이만 지속될 뿐 시종 정확한 답은 얻어지지 않는다.
 “제 머릿속의 사유는 지금 헝클어진 실타래와 같습니다.”
 “그게 도리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지. 너무 완벽하고 정확한 해답은 수학에서나 가능한거지 인생의 공식에서는 얻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네. 모든 걸 다 따지고 의식하면 사람은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걸세.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감정에만 충실하게. 나머지 윤리적 문제는 시대의 수수께끼로 남겨두고. 사랑의 배신자로 되지 말게. 그건 죄를 두 번 짓는 것과 같네.”
 “그러나 유리 씬 며칠 뒤면 미국으로 떠나갑니다.”
 “거리나 국경이 사랑을 갈라놓는 물리적장애로는 될 수 있지만 정신적장애로는 될 수 없네. 사랑은 몸으로보다는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 애의 미국행도 상황에 따라서는 포기할 수도 있는 거고.”
 상황에 따라서 포기한다?
 그럼 유리를 미국으로 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내가 하기에 따라 상황도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지? 그녀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가지 말라고 매달리기라도 하란 말인가.
 “자, 우리 그만 일어날까? 시간도 꽤나 흘러간 것 같으니.”
 종철은 할말을 다한 듯 벗어놓았던 양복저고리를 집어 들었다.

 

붉은아침 (전2권)

장혜영 지음

도서출판 어문학사
정가 각권 10,000원

인터넷구매 9,000원

2008년 5월 30일 발행

전국주요서점 구입 가능